본 번역물은 동방창상화의 aho 작가의 작품을 작가의 허락을 받아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글의 저작권은 aho 님에게 있으며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줄 간격은 원작의 줄 간격에 맞춰 띄우고 있으므로 조금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전Lumius-

원작 URL - http://coolier.sytes.net/sosowa/ssw_l/60/1223659216

 

 

원작 투고 시기 - 2008년 9월 21일

 

 

 

어디까지나 저만의 설정을 내질러버리는 느낌으로 쓴 사이드 스토리입니다. 읽으실 때 주의해주세요.

-by.원작자 aho






눈을 뜨자 시야 가득히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신사, 도둑맞았나?'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딴죽을 걸며 하쿠레이 레이무는 느긋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여긴 어디려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음, 사람 마을 근처의 길가, 려나?'

 

그렇게 생각하고서 레이무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위화감이 있다.

 

'아, 그런가. 산이 푸르구나.'

 

분명, 어제까지 계절은 가을이었다. 요괴의 산에 가서 아키 자매 중의 한 사람과 탄막승부를 벌여 압승한 뒤, 보수로 강탈한 군고구마를 마리사와 같이 배불리 먹고, 그 뒤로 싸구려 소주로 밤을 새우며 바보같은 이야기로 불타올랐고.

 

'그럼, 그 뒤로 어떻게 된 걸까? 전혀 기억이 안나네......'

 

 그렇다면 술에 취해서 거의 의식도 없는 상태로 여기까지 걸어왔던가, 혹은 날아왔다는 건가. 흐음.

그렇게 끙끙거리며 생각해내려 했지만 역시 어젯밤의 일이라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나'

 

레이무는 생각하기를 깨끗이 포기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머리를 굴려 보아도 별 수 없어. 될 대로 되라지, 란 식으로 평소처럼 생각했다.

 

'그런 것 보다, 왜 산이 푸르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까진 가을이었을 테고....... 이변, 인가?'

 

기온을 생각해 보면 계절은 초여름 정도일까. 시원하진 않지만 여름을 넘긴 건 아니었다. 누군가, 강한 힘을 가진 요괴가 계절을 가을에서 여름으로 바꾸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바꿀 거라면 봄으로 하란 말야. 그러면 꽃놀이라도 하면서 마음껏 마셔줄텐데.'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레이무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저쪽에 이변의 원인이 있다'는 것 같은,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이변이,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고 레이무는 떨떠름하면서도 인정했다. 자신의 무녀로서의 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믿고있는 것이다.

 

"그치만.... 이변이 아니라면 왜 어제까진 가을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 되어 버린걸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레이무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 누가 탄막놀이를 하고 있는데?'

 

탄을 주고받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므로, 레이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뭐야 저게? 어린애......?'

 

하 늘을 날며 탄막을 전개하고 있던 건 양쪽 다 인간 여자아이었다. 사람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요괴, 가 아니다. 이것도 무녀로서의 감이었지만, 요괴는 만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 번 보면 "아, 이녀석 요괴구만" 하고 왠지 모르게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 레이무의 눈앞에서 하늘을 날며 서로 탄막을 쏘아대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인간 여자아이었다. 둘 다 앳된 모습으로 진지하게 탄을 쏘아대며, 사이사이로 피하고, 나아가선 스펠 카드까지 발동시켰다.

너무나 황당한 광경에 레이무는 멍하게 입을 쩍 벌린 그대로 서서 굳어버렸다.

 

(케이네가 서당 아이들에게 탄막놀이의 실습이라도 시키고 있는 걸까?)

 

수십초 정도를 생각하고 나서 도출해낸 결론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시킬 이유도 알 수 없고, 일단 영력이니 마력이니 하는 잘 모르는 힘을 이용해서 탄을 만들어 내는 게 탄막놀이인 만큼, 인간 아이에 저 정도 나이는  명백히 이상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혼 란스러워 하는 레이무의 앞에서 한 여자아이가 상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작은 몸이 엄청나게 날아가며 그녀가 전개했던 탄막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위험햇!" 하고 무심코 말한 레이무의 앞에, 그러나 여자아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듯 한 몸놀림으로 훌륭한 공중제비를 돌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아~ 또 져버렸어~"

"헤헷, 이걸로 내 5연승이네."

"치잇! 두고 봐! 다음엔 무조건 이겨 줄테니까~!"

 

나중에 내려온 이긴 여자애와 진 쪽의 여자애가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 다 아까까지 보이던 진지한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이다.

눈 앞의 둘의 모습에 왠지 자신과 마리사를 떠올리며, 레이무는 살짝 웃었다.

 

'음..... 그건 그렇고.'

 

레이무는 턱에 손가락을 대고 아까의 탄막놀이를 떠올렸다. 둘 다 다소 서투르기는 했지만 꽤 아름다운 탄막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회피하는 것도 나름 잘 하는 편이었고, 아마 루미아 정도라면 호각으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어린 애들 치곤 대단한걸. 어디, 스펠 카드 룰 창시자로서 격려라도 한 마디 해 줄까.'

 

왠일로 그런 기분이 든 것도,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이 자신과 마리사의 모습에 겹쳐졌기 때문이겠지. 레이무는 기분 좋게 말을 걸었다.

 

"얘, 너희들!"

"응?"

"왜요?"

 

아까의 네 탄막은 어쩌구 어쩌구 이야기하던 두 사람이 같이 돌아보았다. 왜 저렇게 놀라는 걸까, 조금은 의문이 들면서도 기분이 한껏 좋아진 레이무는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까 겨루는 걸 봤는데, 어린 애들이 꽤 좋은 탄막을 쓰는구나. 칭찬해줄게."

"에, 그"

"감사합니다."

 

이쪽이 모처럼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었는데도 상관없이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으로 무서운 듯 서로를 껴안았다.

이런 대응을 보이면 아무래도 기분은 좋지 않다. 레이무는 뺨을 경직시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왜 그러는 걸까~? 뭔가, 마치 수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 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그, 그거야"

"언니의, 그 옷........"

"옷?"

 

듣고 나서 레이무는 자신의 복장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처럼 조금 특수한 디자인의 무녀복이다.

이 옷이 뭐라도 되는지 물어보려다가 레이무는 말문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요괴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버리는 것 때문에 '하쿠레이 신사는 요괴에게 넘어갔다!' 라는 소문도 있긴 있었지. 그러면 나도 당연히 요괴취급을 받겠고.'

 

어쩌면 이 여자애들은 '나쁜 짓을 하면 무녀가 잡아먹으러 온다' 던가, 그런 걸로 부모에게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망할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녀석은 무조건 날려버리겠어, 하고 속으로 강하게 다짐하며 레이무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니, 걱정 안해도 괜찮단다. 나는 좋은 무녀니까."

"좋은 무녀?"

"그래 맞아. 어디보자, 저쪽에 하쿠레이 신사라고 알고 있니?"

 

신사 쪽을 가리키자 두 여자애는 얼굴을 마주보며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를 무서워하는 모습이었다.

레이무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느 거기 무녀를 하고 있거든."

"엣? 하쿠레이의 무녀?"

"언니가?"

"그래 그래 그거 그거. 내가 하쿠레이의 무녀야."

 

레이무가 없는 가슴을 펴고 말하자 여자아이들은 얼굴을 맞댔다.

그리고, 이번엔 왜인지 엄청나게 화난 얼굴로,

 

"거짓말쟁이!"

"뭐엇!?"

 

레이무는 당황했다.

 

"아니, 잠깐, 거짓말쟁이라니 무슨 소리야!?"

"거짓말쟁이 맞잖아. 그런 가짜 옷까지 입고 말야!"

"언니가 하쿠레이의 무녀님일 리가 없잖아!"

"우와. '하쿠레이의 무녀님'이라니, 요즘 애들은 교육이 잘 되어있네...... 가 아니라! 내, 내가 하쿠레이의 무녀일 리가 없다니....."

"그야 다른 걸. 그치?"

"응. 언니는 무녀님이랑은 전혀 달라."

"어디가?"

"전부"

"가짜다. 가짜 무녀야."

"이, 이 꼬맹이들이...........!"

 

레이무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차라리 정의의 주먹을 구경시켜 줄까, 생각하다가 아니, 잠깐, 기다려, 하고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화를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레이무. 어린애 상대로 이런 짓을 했다간 또 유카리같은 애들이 '아아~~ 이 어어얼~~~마나 끄으으읕~~~내주는 멍청이일까요~~~' 라던가 말할 게 틀림없어! 진정하자, 진장하자구.......!'

 

스읍, 하아. 심호흡을 한 뒤 레이무는 어떻게든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역시 하쿠레이의 무녀야. 아무렇지도 않다구! 속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물어보겠는데,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쿠레이의 무녀는, 이름이 뭐야?"

"무녀님의 이름?"

"그런 거 당연하잖아."

 

두 사람은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 입을 모았다.

 

"하쿠레이 레이무!"

"그것 봐! 하쿠레이 레이무는 내 이름인걸!"

 

득의양양하게 여자애들을 손가락질하자 아이들도 지지 않고 대들어왔다.

 

"거짓말이야!"

"역시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에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대체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그야 언니, 우리가 알고 있는 무녀님이랑은 전혀 다른걸!"

"어디가 다르다는 건데?"

"무녀님은 그렇게 머리 나빠보이지 않아."

"그렇게 가난해 보이지도 않아."

 

좋았어 결정. 이녀석들 날려버린다.

레이무가 뼈마디소리를 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께를 두드렸다.

 

"자자, 진정하세요.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어린애가 하는 말이잖아요."

"뭐야.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오는 말이라고 막 하지 말란 말야........ 꺅!"

 

뒤를 돌아본 순간, 레이무는 엄청나게 큰 비명을 질렀다.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 곳에 서 있던 건...... 아마도 서 있을 것 같이 생긴 물체는, 한 마디로 말하면 눈알의 산이었다. 질퍽질퍽한 녹색의 진흙 덩어리 같은 물체에 천 개는 되어보이는 눈알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입이라고 생각되는 숨구명같이 생긴 것도 다섯 군데나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굵고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괴라면 질릴 정도로 보아온 레이무에게도 충격적인 요물의 등장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온몸을 부들부들 흔들며 그 물체가 수많은 눈알을 한 번에 깜빡였다. 이상한 게 없는지 확인한 후 안도하는 한숨이 다섯 개 정도의 입에서 '후우.' 하고 흘러나왔다.

 

"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요. 놀래키지 말아 주세요."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드디어 쇼크에서 해방된 레이무는 노성을 질렀다. 눈앞의 물체의 눈알 전부가 전부 같은 타이밍에 깜빡이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다. 우와아, 기분나빠, 하고 생각하며 레이무는 조심스래 질문했다.

 

"당신 뭐야. 대체 뭐야. 에, 뭐냐, 새로운 종류의 요괴?"

"요괴요? 하하하, 농담도."

 

그 대답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다.

 

"그치? 당신같이 영문을 모르게 생긴 요괴가 있을 리는 없지........"

"저는 발큐리앗쵸 벨리그릭시아 성인과 인간의 혼혈이고, 요괴와는 또 다른 존재랍니다."

 

말하자면 요괴보다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체 같다. 레이무는 탈력해서 그대로 그 자리를 떠버리고 싶은 와중에 일단 계속해서 질문했다.

 

"저기 말야.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뭘 말인가요?"

"여기 말야, 환상항이 틀림없는 거지?"

"네. 틀림없습니다만."

".......그리고 당신은 뭐였지?"

"발큐리앗쵸 벨리그릭시아 성인과 인간의 혼혈이랍니다. 인간의 마을에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고 있어요."

"헤에~ 그렇구나........ 라니, 인간 마을의 교사?"

 

싫은 예감이 든다, 고 생각한 순간에 레이무의 곁을 아까의 여자애 둘이 지나가며 함께 눈알의 산에 안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입을 모아 한 말은,

 

"케이네 선생님~!"

 

죽을까보냐 생각했다. 죽을까 생각했다.

 

"이젠 싫어어어어어엇!"

 

레이무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에서 도주했다.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날아가는 것도 잊고 달리는 걸 몇십분. 정신을 차려 보니 레이무는 다시 본 기억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 여기, 유카리네 집 근처네.'

 

길을 더듬으며 달려온 곳이라서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골랐다.

여러가지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머리 나사라도 풀릴 것 같았다.

 

'일어나 보니 가을에서 여름이 됐단 말야? 인간 애들이 탄막놀이를? 내가 아닌 사람이 하쿠레이의 무녀? 케이네가 케이네가 아닌 무언가의 외계인이라는 눈알덩어리 괴물?

 

영문도 모르겠거니와 생각해 봐도 이해불가. 레이무는 그곳에서 고개를 휙휙 내저은 뒤 눈을 치켜뜨고 결론을 내렸다.

 

" 이변이야. 이건 틀림없이 이변이야. 내 감은 여전히 반응이 없지만 이게 이변이 아닐까보냐. 그리고 범인은 아마 유카리! 이런 이상한 일을 할 녀석은 그 녀석밖에 없어! 즉, 유카리를 때려눕히면 만사 해결이라는 걸로 결정! 그런 고로 정신이 이상해지기 전에 유카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 정말이지."

 

레이무는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여전히 날아가는 것도 잊고 유카리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앗! 이상한 녀석 발견!"

 

우와아, 또 뭔가 왔다.

레이무는 울 것 같으면서도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상공에 작은 사람의 모습이 떠 있었다. 붉은 색을 기본으로 한 법의같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로, 머리 양쪽 위에는 고양이같은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후후후, 우리들 야쿠모 일가의 본거지에 당당히 잠입하려 하다니, 바보같은 녀석! 여기서부터는 한 발자국도 더 갈 수 없어! 뭐, 뭘 하는거야!?"

 

레이무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올랐기 때문에 여자애의 대사는 도중에 비명으로 끊어졌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가까워졌고, 접근해온 건 물론 레이무다.

 

"뭐, 뭐야, 뭐하는거야."

 

기세에 눌린 듯 반쯤 울며 몸을 뒤로 뺀 그 여자애를, 레이무는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있는 힘껏 껴안았다.

 

"다행이다~앗!"

"푸헥!? 잠깐, 뭘 하는거야! 그만둬, 납작한 가슴으로 끌어안지 마!

 

레이무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여자애를 요괴 체면이 무색해질 정도의 힘으로 끌어안으며, 우는 그대로 뺨을 비볐다.

 

"살았다, 진짜 다행이야.......! 내가 아는 의미의 요괴같은 요괴가 제대로 존재하고 있었어......!"

"으엑, 그만둬, 기분나빠, 저리 가."

 

진짜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애를 수십초간 잔뜩 끌어안고 뺨을 부빈 뒤, 레이무는 휙 하고 떨어져 나왔다. 여자애는 급히 레이무에게서 거리를 둔 뒤 주섬주섬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다시 자신만만한 웃음을 띄웠다.

 

"후, 후후훗. 처음 만나자마자 묘한 공격을 해 오잖아. 하지만 이 도도메를 얕보지 말란 말야. 이런 이상한 공격으론 쓰러지지 않는다구!"

"아니, 딱히 공격은........ 그것보다, 도도메가 뭐야?"

"내 이름! 훗, 나를 동요하게 만든 너에겐 특별히 가르쳐 주지. 이몸이야말로"

 

스읍,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야쿠모유카리님의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  야쿠모 도도메 님이시다앗!"

 

파앙, 하는 파공성이라도 들릴 기세로 자기를 엄지로 가리켰다.

레이무는 뒷머리를 긁적인 뒤,

 

"헤~에~ 그런거구나아~"

"반응이 약해!?"

"뭐, 딱 좋네. 네가 야쿠모 가의 식이라면 유카리네 집으로  안내 좀 해줘. 내가 아는 곳이랑 장소가 달라서 곤란하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가 아니라!"

"오, 역시 말단. 부려먹히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걸."

"말단이라고 하지 마! 그, 그것보다, 다, 당신 지금, 야쿠모유카리소녀님을 막 불렀겠다.......!"

 

 두려움에 떠는 여자애에게, "그게 뭐" 라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뒤, 레이무는 손바닥을 쳤다.


"아, 그런가. 도도메란 건 도도메색(체리색=버찌색)을 말하는 거구나. 유카리(보라색), 란(짙은 파랑색), 첸(귤색), 이런 식으로 색을 붙여서 야쿠모 일가의 이름을 통일했구나."

"그런 건 상식이잖아..... 것보다, 다, 당신, 유카리 소녀님 뿐 아니라 란 소녀님까지 막 부르다니."

"저기 말야, 아까부터 그 '소녀님' 이란 게 대체 뭐야. 여러가지 의미로 양심없는 말 같은데."

"뭐어? '소녀'는 야쿠모의 일원들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의 호칭인게 당연..... 뭐야 당신, 그런 것도 모르는거야?"


풋, 하고 웃는 도도메에게 레이무는 가볍게 살의를 느꼈다. 고양이귀 소녀는 득의양양하게 따라오라고 하며 유카리네 집으로 가는 길로 앞장서서 레이무를 인도했다.


"보도록 해. 이게 야쿠모가의 위대한 창시자, 야쿠모 유카리 소녀님이야!"


하고 도도메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낯익은 사람의 석상이 하나 있었다. 받침대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는,


───야쿠모 가의 창시자이자 환상향의 수호자, '영원의 소녀' 야쿠모 유카리 상


일단 몽상봉인으로 박살냈다.


"뭣! 무, 무슨 짓을!"

"못 참아! 뭐가 '소녀'라는 거야, 정말이지. 그 녀석 같은 건 야쿠모 유카리 '할망구'가 딱이라구."

"이, 이녀석, 야쿠모가를 물로 봤겠다! 더이상 용서하지 않겠어, 싸우자!"

"그래 그래."


흥분해서 스펠카드를 꺼내는 도도메에 비해, 레이무 쪽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도도메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레이무는 필사적으로 내쏟는 빈틈투성이의 탄막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쏙쏙 빠져나갔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서 탄을 잔뜩 뿌리자 고작 수십초 정도만에 고양이귀 소녀는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자, 내가 이겼어. 엉성한 탄막이었는걸."

"그, 그런. 이렇게 간단하게.......!?"

"것보다 의미없는 운동 좀 시키지 말아 주겠어? 이쪽은 영문을 모를 일만 일어나서 지쳐 있단 말야."


엉망이 된 도도메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양이귀 소녀는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어께를 떨며 신음했지만, 이윽고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같은 그 반응에, 레이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잠깐, 탄막놀이에서 진 정도로 그렇게 울지 마."

"그치만, 적어도 결계의 수호자인 야쿠모의 일원이 이런 머리나빠보이는 녀석에게 졌다니."

"좋아, 알겠어, 마음껏 울어."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프다고오! 귀 잡아당기지 맛! 소녀님 살려줘요!"


그렇게 레이무가 성에 찰 때까지 고양이귀 소녀를 괴롭히고 있자, 갑자기 말이 걸려왔다.


"우리 집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는 게 당신입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의, 명석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지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없었지만, 왠지 귀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


무심코 도도메의 귀에서 손을 놓고, 레이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소녀님~!" 하고, 도도메가 울면서 달려간 그곳에는, 키가 큰 여성이 서 있었다.

도도메보다 장식이 훨씬 많은 법의를 입고,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머리 양쪽에 튀어나온듯 한 고양이의 것 같은 귀에, 조금 드세어보이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수 갈래로 갈라진 고양이의 꼬리가 인상적인 요괴다.

겉으로 보기엔 관록이 있어 보이지만, 전신에서 나오는 기척은 대요괴의 것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짜부라드는 듯 한,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었따.

물론, 본 기억은 없다. 없었을 테지만.


'이 요괴, 설마.....'


울며 안겨드는 도도메를 달래면서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요괴 앞에서 레이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래 말을 걸었다.


"저기, 당신 혹시 첸이야?"

"엣?"


여자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쪽을 본 뒤, 엄청나게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도도메에게서 몸을 뺀 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

그 리고,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가까이서 보자, 여자의 영리해 보이는 모습에는 역시 야쿠모의 식의 식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가 인간 여자처럼 성장했다면 분명 이런 모습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미모였다.

아마도 첸이라 생각한 여자는, 레이무보다도 더욱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무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입술로 망연하게 불러왔다.


"설마, 하쿠레이 레이무 씨, 인가요?" 

"그래."

"정말로, 레이무씨인가요?"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하고 있잖아."

"하지만....... 아아, 그런가. 오늘이 그날이었던 거로군요......!"

"엥? 무슨 말이야."

"레이무 씨~잇!"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첸이 뛰어들어왔다. "위험햇" 하면서 레이무는 옆으로 피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지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얼굴부터 땅에 갖다박으며 "푸헥" 하고 이미지가 망가지는 비명을 질렀다.


"어, 어째서 피하신 겁니까!?"

"당연하잖아! 너같이 덩치 큰 여자가 뛰어들면 난 짜부라든다구!"

"덩치가 크다니......."


더러워진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걸어온 첸은 레이무의 바로 앞까지 와서 "아, 정말이다" 며 얼굴을 폈다.


"이젠 제 쪽이 더 크군요."

"그런 것 같네....... 그렇다는 건 역시 당신, 첸이구나."

"네, 맞아요. 야쿠모 유카리님의 식의 식, 야쿠모 첸이에요."


헤에~, 거리며 레이무의 기억 속의 첸과 같은 모습으로 웃는 고양이녀의 코에서 주륵, 한줄기 코피가 흘렀다.

너무나도 무방비한 데다가 호의로 넘치는 표정에 레이무는 당황했다.


'아까도 껴안으려고 했었고....... 나, 이 녀석에게 그렇게 사랑받고 있었나?'


그것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레이무가 돌아보자 고양이귀 소녀 도도메가 아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당신, 대체 뭐야?"

"글쌔, 대체 누굴까."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야쿠모 유카리의 저택 안은 레이무의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는 필요 없다, 고 말하긴 했지만 첸은 무조건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듣지 않았다.


"그야, 레이무 씨하고 만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인걸요. 여러가지로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에요."


레이무의 옆에 서서 긴 복도를 걸으며 첸이 살며시 미소지었다. 레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기 말야, 그 레이무 '씨' 라고 부르는 거 그만두면 안돼? 아무래도 위화감이 있는데."

"아, 죄송합니다. 그런가, 레이무 씨가 그정도의 나이였었고, 애초에 그다지 대화도 나누어 본 적이 없었네요, 저희들."


그리워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는 첸의 옆모습을 보며, 레이무는 잊고 있었던 중요한 질문을 기억해냈다.


"그래, 맞아. 그거야 그거. 네 말투로 봤을 때....... 랄까, 겉모습으로 보기에도 명확한데, 이 환상향은 아무래도 미래의 환상향 같은걸."

"미래..... 그렇군요. 레이무 씨가 보면 그렇게 되는군요."

"구체적으로, 지금이 언제야?"

"그러네요...... 레이무 씨, 당신 입장에서 보면 오늘은 언제인가요?"

"어디....."


레이무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오늘이라고 생각하는 날짜를 말했다. 그러자 첸은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마침 12080년 후의 미래입니다."

"흐음 만 이처............ 에에에에에에에에엑!?"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야쿠모 저택에 레이무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엄청나게 당황하는 그녀의 추태를, 첸은 눈을 살며시 뜨고 부드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놀라게 했나요."

"당연하잖아! 고작해야 100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1만 2천년이라니, 당신."


100년이라고 한 건 미래의 세계로 상상할 수 있는 한계가 겨우 그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1만 2천년이 되면, 이건 이해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선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될 때 까지 네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만. 아무리 요괴라곤 해도."

"후후, 저 뿐 아니라 레이무 씨의 지인은 대부분 살아 있답니다."

"정말로!?"

"네에. 다들, 강한 요괴들이니까요."

"그, 그렇구나......."


왜일까 레이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카리나 스이카는 어쨌든, 자기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유쾌한 요괴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도저히 대요괴로 성장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끙끙대는 무녀를 보며 쿡쿡 웃은 뒤, 첸은 조금 슬프게 눈을 떨었다.


"그렇다곤 해도, 인간이었던 분들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거야 그렇겠지....... 그렇다는 건, 아, 그런가."


갑자기 어떤 사실을 깨닫고 레이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차" 싶어 머리를 긁었다.


"그럼, 역시, 마리사는 죽은 거네?"

"네?, 아, 네, 그렇군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런가. 그렇지. 당연한 거겠지. 응, 이런 건, 아무렇지도."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레이무는 우물우물거렸다. 말하자면, 질긴 인연의 친구는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살다가 죽었다는 거다. 사충의 마법(불로불사의 마법)이란 걸 써서 마법사라는 종족 자체가 되지는 않았던 듯 싶다.

마리사답다며 웃어야 하는지, 살아있어 줬으면 했다고 울어야 할지, 레이무는 알 수 없었다.

거기서 문득,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첸을 보았다.


"왜 그래?"

"아, 아니요..... 분명, 마리사 씨가 여기 있었다면 엄청나게 기뻐했겠지, 싶어서."

"응..... 뭐, 그 녀석이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무지막지하게 오랜만의 재회가 될 테고 말야. 나에겐 어제 같이 술이나 마시며 취하던 녀석이었지만."

"그건, 정말로 레이무 씨 답네요."


첸이 입가에 손을 대고 기품있게 웃었다. 그 움직임에 소매에 꿰매어진 수많은 방울들이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뭔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걸. 그거, 당신 취향이야?"


금색 실로 장식된 수많은 술 하며 진한 색의 띠가 엄청나게 많이 붙은 법의를 보고 말하자 첸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요, 딱히 제 취향은 아니고........ 야쿠모 가도 꽤 커져버려서 각자의 지위를 알기 쉽도록 복장에 차이를 둬 달리고 밑의 아이들에게 부탁받아서요."


아까 밖에서 만난 고양이귀 소녀가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라던가를 말한 걸 레이무는 떠올렸다.


"과연, 그럼 당신은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거군."

"일단, 유카리 님과 란 님 바로 다음으로, 야쿠모 가에선 서열 3위의 지위에 있으니까요. 두분께 비하면 아직 부족한 몸이라 부끄럽지만요."

"부끄럽다면 그거겠지, 야쿠모 첸 "소녀님" 이었나."

"그건 정말로 부끄러워서 그만해 주세요. 정말, 유카리님도 재미있어 하시기만 하고......."


첸이 탄식했다. 레이무가 아는 야쿠모 란 같은, 아주 고생이 많아보이는 느낌이다. 그 자유분방한데다가 조금 멍청해 보이던 고양이 소녀가 이렇게도 변할 수 있는 건가 싶어 레이무는 기묘한 감개를 품었다.


'뭐, 만년 이상이나 지나서 뭐든지 옛날 그대로였다면 그쪽이 이상하긴 하겠지만.'


거기서 문득 "응?" 하고 레이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첸."

"왜 그러시나요."

"나 말야. 이 시대에 왔을 때, 내가 있던 곳이 인간 마을 가까운 곳이라고 금방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어제랑....... 계절 이외에는 그다지 변한 건 없는 경치였단 말인데."

"그런가요......."

"응. 하지만 만 2천년 후였나? 그런데도 그렇게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레이무가 솔직하게 의문을 표하자 첸은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죠. 물론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이유라. 어떤?"

"어떤 분의 유언이었어요. 이 환상향을 자기가 죽은 뒤에도 계속 같은 모습으로 있게 해 달라고."

"헤에. 말도 안되는 걸 요구한 녀석이 있었다는 거네."

"레이무 씨."


갑자기 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환상향은 예전 그대로인가요? 당신의 기억에 있는 그 경치와 하나도 다른 게 없는 건가요?"

"왜 그래, 갑자기. 진지한 표정 하고는."


레이무는 웃었지만 첸은 웃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진지했다.


"저기"


레이무는 뭔가 껄끄러움을 느끼고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작게 끄덕였다.


"응. 아직 전부를 둘러보진 않았지만, 경치는 어제랑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미래로 왔다고 들었지만 아직도 믿지 못할 정도고."

"......그런가요. 그정도로 환상향은 옛날 모습 그대로인가요."


첸은 길고도 긴 한숨을 토했다. 마치 여태껏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를 이제서야 내려놓은 듯이.

그리고 쑥쓰러운 듯이 눈가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에에, 별 말을. 아니, 왜 감사를 받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겠네요. 모르시겠군요. 죄송합니다."


첸은 가볍게 고게를 숙인 뒤 다시 조용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레이무도 당황하며 다시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왠지 케이네가 기분나쁜 눈알더미 괴물이 되어버렸던데."

"기분나쁘다니........ 실례에요 레이무 씨. 그 분의 본명은 겔그락치 바쵸라스굿티인데, 환상향에서도 손꼽는 지식인이란 말이에요."

"그런 거 모른다구....... 아아, 본명이란 말은 역시 그건 케이네 본인이 아니었구나?"

"레이무씨가 케이네라고 부르는 1대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씨를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 물론 달라요.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지금 케이네라 부르는 건 인간 마을의 수호자와 서당의 선생을 겸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에요."

"즉, 케이네라는 게 직함처럼 됐다는 거야?"

"이름 계승제에요. 인간 마을의 수호자였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씨에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마을의 수호자들에게 대대로 케이네라는 이름을 붙여 준 거에요."

"어딘가의 성인인가 하고 인간과의 혼혈이라던데."

"네. 반인반요라던가 '인간과 무언가의 사이에 있는 자'라던가, 마을의 수호자이기 위한 조건이니까요."

"수인이었던 케이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렇다기 보다는 인간의 마을을 지키는 것이 케이네씨가 아니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째서?"

"분명, 나중에 알게 될 거라 생각해요."

첸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한 뒤 갑자기 멈춰 섰다.


'아, 여긴'


레이무도 눈치를 챘다.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유카리의 침실 문 앞이다.


'여기도 변한 건 전혀 없구나. 이 앞쪽에 자기 자신을 '소녀님'이라고 부르게 하거나 석상을 만든 틈새요괴 할망구가 있다 이거지.'


재회를 하면 일단 그 웃기지도 않는 태도에 대한 화답으로 오른쪽 볼에 스트레이트를 먹여주겠다는 의기양양한 레이무의 앞에서 첸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카리님께 레이무님이 오셨다는 걸 전해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첸이 배례한 뒤 슬며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무가 어찌저찌 두근거리며 수십초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 곤란한 듯이 보이는 첸이 다시 문을 열고 돌아왔다.


"저기, 레이무 씨."

"왜 그래?"

"죄송합니다. 유카리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레이무는 허탈해졌다.


"이것 봐."

"그러고 보니 레이무 씨와 재회한 충격으로 지금이 한낮이란 걸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깨우려고 했더니 거칠게 물리쳐버리면서 "레이무?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구나. 뭐, 밤까지 기다리라고 해 줘." 라더군요."

"여전하네, 그 녀석도."


레이무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쉰 뒤 "뭐, 괜찮겠지"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밤까지 기다릴게."

"괜찮으신가요?"

"응, 뭐, 들어가서 있는 힘껏 날려버리고 두들겨 깨우는 것도 나쁘짆 않지만 그런 걸로 시간이 걸리면 아까우니까."

"아깝다, 라 하심은."

"왠지, 말야. 예감이 들어. 상황을 파악했더니 이제서야 감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 같아.


레이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오늘 정도뿐인 것 같아.아마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없겠지."

"그런가요."

"응.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무녀로서의 감, 인가요?"
"그래. 뭐, 애초에 어째서 이런 미래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걸."


그런 것에 대해서 레이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유카리가 나쁜 장난이라도 쳤다거나 마리사의 버섯이 어쨌다거나 에이린의 약이 저쨌다거나, 그런 거겠지.'


뒤집어 말하면 원인이 될 게 너무 많아서였다.


"뭐, 어떤 게 원인이든 깨놓고 말해서 대책이 변하는 건 아니야. 원인을 일으킨 녀석을 탄막으로 반죽하고 난 뒤 술이나 안주를 받아내서 적당히 부어라 마셔라 한바탕 하면 되는걸."

"여전하시네요."

"그게 암묵적인 이해라고 할까, 약속같은 거잖아, 우리에게 말야."

"그러..... 네요."


가늘어진 첸의 눈이 쓸쓸한 빛을 띄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이무는 입이 근질거렸다.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단 말야, 이런거. 뭔가 좀 미적지근한 느낌이란 말이지.'


레이무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첸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왠지 내가 여기로 올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 그렇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첸에게 "어떻게"라고 묻자, 그녀는 짖궂은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레이무 씨 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오늘, 이 날에 어릴 적의 자신이 환상향을 찾아올거라고. 레이무 씨와 만나기 전까지는 오늘이 그날이란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요."

"흐~음."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겠다 싶었던 레이무는 고개를 끄덕었다. 게다가 지금 들은 것 덕분에 알아낸 게 하나 있다.


'오늘 여기로 올 걸 12080년 전의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즉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무사히 원래의 시대로 돌아갔다는 거겠지. 좋아, 이걸로 걱정할 건 없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레이무는 웃으며 첸에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슬슬 가 보도록 할게."

"아, 그러신가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서 죄송해요."

"아냐, 여러모로 알게 된 것도 있고. 아, 덤으로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

"무엇인가요."

"야쿠모 란 소녀님은 어디로 간 거야? 통 보이질 않는데."

"소녀님은 그만둬 달라니깐요. 란 님이라면"


첸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반딜리아 성계에서 일어난 제 37차 승발라리아 전쟁의 감시를 하기 위해 나가 계십니다. 이 전쟁의 형세가 이쪽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기에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헤에, 그렇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레이무는 적당히 흘러넘겼다.









유카리의 저택에서 나온 레이무는 일단 하쿠레이 신사 방향으로 날았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면 역시 거기였기도 하고, 신사가 환상향의 끝자락에 있는 이상, 날아가는 도중에 여러 장소를 돌아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 음, 요괴의 산은 변함없네. 모리야 신사는...... 있구나. 없어졌어도 좋았는데. 헤에, 인간의 마을도 조금은 커졌지만 그거 이외엔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고. 죽림에는 영원정도 있고...... 우와, 홍마관까지 그대로야. 여전히 악취미적인 색인데.'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레이무는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예전 그대로이다. 레이무에게는 어제의 경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긴 정말 1만년 이상의 미래세계일까. 어쩌면 속고 있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해 봐도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첸의 모습은 틀림없이 첸이 성장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누군가가 짖궂은 장난을 위해 속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를 모르겠다.


'상관없으려나. 혹시 속았다고 해도 기가 막히는ㄷ 발상에다 꽤 재밌는 거짓말이기도 하고. 그냥 걸려주도록 하자.'


어제와 다름없는 환상향의 하늘을 날며 레이무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마법의 숲 위를 지나던 도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사는 없다고 했었나.'


깊은 숲에 가려져 숲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환상향 전체가 이렇게까지 바뀌지 않았다는 건, 마리사의 집도 그대로 있다는 걸까. 살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생각해도 별 수 없겠지. 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이 살아있다는 건 앨리스도 여전히 있다는 거겠고, 나중에 놀리러 가 보도록 할까.'


하지만 마리사가 나와 같은 상황에 빠졌다면 엄청나게 재미있어 하겠지, 조금은 유감스러운 느낌을 받으며 레이무는 하쿠레이 신사로 계속 날아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이무는 하쿠레이 신사의 경내에 착지했다. 여기도 역시 어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 내가 아닌 하쿠레이의 무녀가 있다고 했지.'


몇 시간 전에 만난 여자애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여기엔 자기와 같은 이름을 쓰면서도 자기보다 머리가 좋아 보이고, 더욱이 빈곤해 보이지도 않는 무녀가 있다고 했던가.


'말하자면 케이네처럼 내 이름도 계승제가 됐다는 거겠지. 흥, 몇대째의 레이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를 얕보지 말란 말야. 주제넘은 태도를 취하면 초대 레이무로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이면서 전력으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줄테야.'


그 때의 울화를 생각해 쓸데없이 호전적이 되며, 레이무는 거친 모습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초대 레이무님께서 돌아오셨느니라-앗!"


하고 한껏 기분에 취해 소리쳤다. 그러자


"초대님이신가요."


방울 소리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고, 신사의 그림자에서 한 명의 여성이 조용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작은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레이무는 무심코 숨을 죽였다.


초 여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가는 흑발은 거칠 것 없는 냇물처럼 빛을 춤추게 하고 있었다. 등은 올곧고 길게 펴져 있었지만, 그걸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다. 고상하고 그윽하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은은하게 떨고 있었다. 단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양 손은 눈보다 하얗다. 발걸음은 청초했으며 돌계단을 사뿐히 내려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아련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꿋꿋한 미모를 자랑하며, 조금 가는 듯이 보이는 몸매는 덧없게 보이면서도 부드러움과 칼날 심지의 강함을 고루 갖추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 전체에서 레이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쳐흘렀다.


'버, 벚꽃이....! 저 애의 등 뒤에, 아름답게 춤추며 흩날리는 벚꽃이 보여! 지금은 여름일텐데......! 이 무슨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두려움에 전율하는 레이무의 눈앞에, 이상적인 위치에서 멈추어 선 무녀는 눈을 살며시 감은 그대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초대님의 귀환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했습니다앗!"


레이무는 전력으로 무릎을 꿇었다.


"엣....... 저, 저기, 초대님?"

"야, 이거 참 정말로 죄송합니다. '환상향의 무녀라면 나밖에 없잖아. 코치야 사나에? 하핫, 그녀석은 2P칼라일 뿐이고' 라던가 주제넘은 소리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부디 용서를.....!"


레 이무는 비굴해졌다. 더이상 비굴해질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해졌다. 무엇보다 레이무를 비굴하게 만든 건 눈 앞에 있는 무녀의 모범으로 보이는 미녀가 틀림없이 자기가 고안해 낸 것이 분명한 겨드랑이가 뚫려 있는 무녀 복장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왜 제대로 된 무녀복을 입지 않고 저런 부끄러운 옷을 입었던거야 난. 죽어. 죽어버려!'


돌바닥에 머리를 쾅쾅 내리찍기 시작한 레이무의 머리 위에서 "잠, 초대님, 정신을, 정신을 차리세요!" 하고 미래의 레이무가 외치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미안해."

"아니요, 전 초대님이 어째서 사과를 하시는지 모르겠는걸요......."

"몰라도 좋아. 아, 일단 내일부터 그 무녀복은 폐지해. 제대로 된 걸로 입어."

"어머, 그런. 이건 초대님에게서 물려받아 계승한, 유서 깊게 내려오는 무녀복이에요. 폐지라니, 도저히."

"그렇단 말은 저렇게 내려오기까지 수백명 단위로 겨드랑이가 열린 무녀가 환상향의 하늘을 날아다녔단 말입니까!"

"네. 이 무녀복을 입음으로서 겨드랑이 부분을 통해 팔백만의 신님들이 신통력을 넣어준다는 말이 전해져서요."

"게다가 뭘 무리하게 말도 안되는 이유를 집어넣은거야 난! 우와아, 진짜 죽고싶네!"


언제나의 하쿠레이 신사의 언제나의 툇마루에서, 레이무는 데굴데굴 굴렀다. 비굴한 느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야, 내 자신은 멋진 디자인이라고 생각했고,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자신도 있었지만 말야! 그치만 이런 정통파 미녀가 입으면 이건 그냥 질 나쁜 농담이라고밖에 생각이 안되잖아!'


그런 걸 생각하며 절규하는 초대님의 모습을, 미래의 레이무는 약간 굳은 미소를 띄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저기, 초내님."

"왜, 왜그래?"

"뭔가, 제 복장에 미흡한 점이라도 있었던 건지요."

"아니, 미흡한 건 나라서 죄송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하쿠레이의 무녀의 상징이기도 한 무녀복을 이 몸에 걸치는 것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 렇게 말하고 나서 미래의 레이무는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미소 짓지 말아줘, 너무 눈무시니까." 하고 작게 중얼거릴 지경에 이르러 레이무는 간신히 약간이나마 진정했다. 거북한 기분에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미래의 레이무를 향했다.


"어디, 그럼 일단 인사라도. 처음 뵙겠습니다, 저, 하쿠레이 레이무입니다.

"네, 처음 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하무레이 레이무라고 합니다."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진지하게만 보였지만 의외로 농담도 통하는 애려나 싶어 레이무는 인식을 조금 고쳤다.


"그래서, 그........ 당신은 몇대째야?"

"네, 저는 초대님으로부터 시작해 318대째의 하쿠레이 레이무입니다."

"318대란 말이지. 뭐, 1만 2천년도 더 지나면 그 정도는 되려나."


그렇다면 무녀가 바뀌는 평균연령은....... 을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그런 건 알아도 별 의미가 없다.

거기서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레이무는 물어보았다.


"저기, 가계도 같은 거 있어? 조금 보고싶은데."

"아, 네.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318대째의 레이무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안채에 들어갔다. "으으음 좋은 엉덩이로다" 하고 의미없이 중얼거린 뒤, 내어온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찻잎이 항상 자기가 쓰던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알고 나자 뭔가 분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음, 수고 많았다...... 그건 그렇고 역시 좀 기네."


318대째의 레이무가 가져온 것은 꽤나 큰 두루마리였다. 왠지 비술이나 다른 무언가라도 있을 것만 같은 크기였다.

조금 떨면서 레이무에게 318대째가 '여기 있습니다' 며 두루마리를 펼쳐왔다.

물론 전부 한번에 펼칠 수는 없었으므로 레이무는 조금씩 둘둘 말아가며 가계도를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처음에 있는 게 318대고 다음이 317대........"

"저랑 어머니에요."

"당신은 아직 아이가 없어?"

"네."
"흐~음. 좋아하는 사람이라던가?"

"어머나, 그런. 부끄럽습니다."


318대째가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귀엽잖아 젠장, 이라고 생각한 뒤, 레이무는 가계도를 계속 되짚어 올라갔다.


"267대째 레이무, 266대째 레이무...... 저기, 뭔가, 계속 레이무밖에 없는데."

"네. 30대째까지는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30대째가 초대님을 엄청나게 존경하면서 "이제부터 하쿠레이의 무녀는 모두 레이무라는 이름을 쓴다."고 정했다고 해요."

"것 참 괴팍한 성격이구만."


자신에게 그런 열정적인 신봉자가 생기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레이무는 등이 근질거렸다.


' 그건 그렇고, 30대째라는 건 나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었을 텐데...... 본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을 존경하게 될 정도로 내 이야기가 남았다는 거겠지. 알고 지내는 요괴들은 다들 살아남았다는 듯 하기도 하고, 아마 누군가가 재미있고 이상하게 곡해해서 전했겠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가계도가 문제의 30대째에 이르렀다. 확실히, 여기까진 모두 이름이 레이무였다.


"것보다, 이 가계도, 거의 한줄밖에 없네."

"네. 하쿠레이 가 이외의 가계는 생략되어 있는데다가 분가가 생기면 여러모로 귀찮다는 이유로 아이는 하나만 키우는 것이 관례랍니다."

"흐음. 뭐, 이해 못할 일도 아니긴 하지만."


확 실히, 하쿠레이 가의 집안싸움 같은 건 레이무 자신도 상상하기 싫은 귀찮은 일이다. 애초에 하쿠레이의 무녀같은 귀찮은 역할 때문에 싸우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긴 하지만, 어디에나 이상한 녀석들은 있는 법이고, 예방하는 차원에서 정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이거 다들 피는 이어진 거야?"

"아니요. 안타깝지만 아이를 만들지 못한 분도 계셔서요."

"그래. 이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는걸. 그런 일도 있을 법 하지....... 그건 그렇고, 양자가 들어와도 가계도가 이어지는구나."


하쿠레이의 피가 하쿠레이의 무녀가 되기 위한 절대조건은 아닌 것도 처음 알았다. 물론 애초에 초대 하쿠레이 무녀 자체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걸, 요컨데 힘이 쌔기만 하면 누구나 해도 되겠지. 그렇게 간단히 납득했다.


'적당적당하구만. 환상향답다면 환상향답지만.'


거기서 문득,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이랑 나는 당연히 혈연관계가 아닌 거네."

"네. 매우 아쉽지만요."


이건 레이무 자신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피을 이은 자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통파 무녀다웠다. 그런 걸 생각하자 왠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초대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방향성은 다르지만 나도 나름 잘 나간다고 생각하고 말야."


얼버무리면서 레이무는 계속 가계도를 읽어나갔다. 30대째 이후가 전부 레이무라는 설명대로 그 이전에는 레이무 이외의 이름도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것도 극소수. 레이무 이외의 이름은 너무나도 적어서 위화감마저 들 정도였다.


"저기, 어째서 레이무밖에 없는거야?"

"그건 물론 초대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하아. 그 말은 다들 나를 존경하고 있다는 거야?"


당연한 걸 묻는다는 생각했는지, 318대째는 웃지도 않고, 오히려 흥분한 듯이 볼을 붉히며 몇 번이고 끄덕였다.


"당연한걸요! 저도 레이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걸 긍지로 여기고 있고, 원조이신 초대님과 만난다는 이 더할나위 없는 명예를 얻었다는 건  선조 레이무님이나 앞으로 태어날 아이 레이무에게 송구할 정도인걸요."

"흐~음. 뭔가 잘 모르겠는데."


동시에 조금 근질거렸다.


"저기, 나 말야, 그렇게나 큰 위업이라도 이룩한거야?"

"네. 그렇게 들었어요."

"뭘 한거야? 환상향의 위기를 구했다던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보다 유카리 쪽이 훨씬 열심히 했을 텐데."


레이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318대째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초대님 때에 환상향이 멸망한다던가 하는 그런 큰 위기는 일어난 기록이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평화에 찌들었던 참이었고."

"하지만 초대님은 지금 이 환상향의 평화가 지켜지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을 만들어 내셨답니다. 그 공로가 너무나도 대단해서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된 거지요."


그렇게 말하는 318대째의 눈에는 순수한 존경의 빛이 감돌았다. 레이무에게 있어서는 익숙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조금 쑥쓰러워져서 미묘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말야, 자기가 그런 큰 일을 해냈다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질 않는데."

"네? 그건 이상해요."


318대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대님의 지금 나이라면 아마 이미 위업을 이룩하셨을 텐데요........."

"뭐? 무슨 소리야?"

"그건...... 아니요, 그만 말하도록 할게요."


318대째는 짓궂은 듯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멈췄다.


"초대님께 저보다 훨씬 더 그 말을 전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니까요."

"응? 누구야 그거."

"초대님도 잘 아는 분이랍니다. 아마 오늘, 조금 있으면 오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 구나."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아니, 일단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지만 이성이 "말도 안돼." 라며 부정한다.

그 갈등으로부터 레이무는 억지로 의식을 끊으며 다시 가계도로 눈을 돌렸다.


'어디, 17대째 레이무, 16대째 레이무, 오우카, 세츠나, 15대째 레이무, 14대째 레이무, 13대째 레이무, 릿카, 12대째 레이무, 뱌쿠야, 11대째 레이무......'


이렇게 보니 정말로 레이무라는 이름이 많다. 30대째가 억지 규정을 만들기 전에도 이미 이정도이니, 자기는 어지간히 경애받는 듯 하다.


'대체 뭘 한걸까, 난......... 아니, 이미 했다고는 들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레이무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가계도의 어떤 부분에서 나타난 이름을 보고 무심코 숨을 삼켰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니, 그야, 이 애의 이름!"


푸훗, 하고 웃으며 레이무는 어떤 항목을 가리켰다.

그곳에 써 있던 건 '미코(魅子)' 라는 이름이었다.


"아, 그건......."

"이거, 미코라고 읽는 거 맞지?"

"네에."

"하쿠레이의 무녀이면서 미코(일본어로 무녀)라니, 이 이름 지은 녀석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충 지었잖아. 대체 누구야, 이렇게 적당적당히 이름을 붙인 녀석이."


엄청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두루마리를 조금 잡아당기자, 그곳에 적혀 했는 이름은 '초대 레이무'였다.


"뭣, 나라고오!?"

"그게, 네에."

"우와, 뭐야 그거, 아무리 그래도 자식에게 무녀라고 이름붙이다니 말도 안....... 되지는 않을지도. 응, 나라면 그럴거야, 분명."


자식이 태어난 그 날에 '이름을 뭘로 할거야' 같은 걸 들어서 '귀찮구만. 무녀가 될 거니까 '미코'로 괜찮잖아?' 라던가. 그런 대답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쉽게 연상돼서 레이무는 상당히 침울해졌다.


"우와아, 미코, 미코라니, 나......... 이 애, 나랑 피는 이어진 거야?"

"아니요, 양자라는 것 같아요."

"들여온 자식에게 그런 적당한 이름을........"

"하지만 상당히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고 해요."

"그래?"

"네. 초대님도 미코님을 매우 귀여워하셨다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니까요."

"......내 일이면서도 전혀 상상이 가질 않네."


으으음, 하고 레이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신음했다.

덧 붙여서, 자신의 다음 대가 양자였다는 것에 위화감은 없었다. 지금 좋아하는 남자같은 것도 없었고, 아마 나중에도 그렇게까지 남에게 끌리는 일은 없겠지 싶어서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왠지 모르게 확신이 있었다. 혈육을 남길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어쨌든, 가계도는 이걸로 전부 봤다. 이것보다 전의 대는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서라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딱히 흥미도 없었다.


"응, 다 봤어."

"네. 만족스러우셨는지요."

'그러네. 일단 유별나게 이상한 가계도였다는 건 잘 알았어."


318대째는 곤란한 듯 웃고 가계도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러 갔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중, 레이무는 조금 식어버린 차를 들이키며 1만 2천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도 길어서 제대로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조금 흥미가 동해서 돌아온 318대째에게 질문해 보았다. 


"저기 말인데. 이 환상향, 겉으로 보기엔 내가 있던 때랑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때?"

"실제로, 말씀이신가요?"

"그래. 1만 2천년이나 지났는데 주민들 쪽은 상당히 변화가 있지 않겠어? 아, 맞다. 마을의 수호자인 케이네는 어딘가의 성인이라고 했었고 말야."

"아, 그러고 보니 초대님 때에는 아직 우주인 쪽은 극히 적었죠...... 영원정의 분들만 환상들이를 하셨었으니까요. 애초에 카구야님들을 우주인이라고 부르는 건 뭔가 다른 듯 한 느낌이 들지만요."


".......우주인?"

" 이 지구 이외의 별에 살고 있는 분들을 말한답니다. 초대님의 시대로부터 조금 지났을 때, 외계에서 우주항행의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태양계, 은하계, 나아가선 외우주로 판도를 넓혀간 지구인이 여기로부터 너무나도 아득한 별에서 지구 이외의 생명체와 처음으로 접촉했을 때, 유카리 소녀님이 결계의 구조를 변경하셨습니다. 지구 뿐 아니라, 그 이외의 혹성에서 잊혀져 사라져가는 이들이나, 성간전쟁 같은 걸로 인해 멸망해버린 별의 분들도 이 환상향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셨답니다.


들어본 적 없는 단어가 많아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레이무는 이해했다.


"즉, 환상들이를 하는 범위가 이 별 이외로까지 넓어졌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많은 생물이, 이 좁은 환상향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아, 초대님께선 아직 모르셨던가요."

"뭐를?"


318대째는 웃으며 검지를 세웠다.


"환상향도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확장공사를 해 왔습니다. 외계 인종의 의식이 우주에 넓게 확산되어 있는 것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도 있고 해서 지금은 지구 전체까지 넓어져 있답니다."


레이무는 눈을 끔뻑였다.


"......그 말은 즉, 이 별 전체가 환상향이란 말야?"

" 네, 그렇습니다. 덧붙여서 이 별 전체를 가리킬 때에는 환상향이 아니라 환상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은하수까지 영역을 넓혀간 인류는 마침내 자기들이 태어난 별 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는 거에요. 별 자체가 야쿠모 님의 결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볼 수도,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싱긋, 318대째는 웃으며 끄덕였다.


"이 일대는 옛날과 변함없이 환상향이라 불리게 됐고, 환상성 발상지로서 성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1만 2천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거에요."

"......솔직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겠어......"

"그러신가요. 무리도 아니겠죠."


거기서 318대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사과한 뒤, 눈을 감고 머리 양쪽에 손가락을 짚었다. 그리고선 이곳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이쪽은 하쿠레이 신사 본산. 어쩐 일이신....... 네, 돈파치 행성 분들이 독립도시 선언을........ 이 별의 환경에는 익숙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알겠습니다. 곧 이변해결을 하러 가 주세요. 괜찮습니다. 그들도 이 별 이외에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스펠카드 룰을 따라 줄 겁니다. 아, 해결 이후의 연회도 잊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말을 마치고, 318대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미소지었다.


"실례했습니다."

"......누구랑 이야기한거야?"

"아아, 하쿠레이 신사 북아메리카 지방 제 776 분사와......."

"분사라니, 당신....... 엥, 하쿠레이의 무녀는 당신뿐이 아니었던 거야?"

"네. 하쿠레이의 무녀는 저뿐이에요. 하지만 확장공사를 거쳐 환상향이 넓어진 이후로는 혼자서 이변을 해결하기엔 손이 부족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세계 곳곳에 분사를 세워서 이변 해결을 도와주시는 분들과 연락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은 이변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요, 그게"


318대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환상향에 사시는 분들이 때때로 변덕으로 이변을 일으키셔서, 상당히 빈번하게 이변해결을 하러 움직이고 있습니다."

"......덤으로, 최근의 이변은 뭐야?"

"그게,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건 홍마관의 레밀리아 님이 일으킨 제 3574차 홍무이변입니다만."

"그녀석은 대체 언제쯤 되야 질리는 건데!"

" 이변 자체가 스트레스 해소를 겸한 축제의 일종이니까요. 거기에 환상향이 지구 전체로 넓혀졌다고는 해도, 요괴 퇴치나 이변 해결의 짜임새는 초대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답니다. 규모가 커졌을 뿐이지,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 예전과 같으니까요."

"시대가 나아간 건지 뒤처진 건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상상 밖이다. 그럼에도 318대째의 눈에 의혹이라곤 보이지도 않으니 아마도 이 시대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거겠지.

머리를 감싸안는 레이무의 옆에서 318대째는 막힘없이 설명했다.


"결계의 상태를 감시하는 야쿠모, 인간의 마을을 수호하는 케이네, 이변을 해결하는 하쿠레이, 이변을 일으키는 새입자나 이형의 누군가들...... 이런 역할은 아마도 초대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그게, 환상향의 밸런스를 유지한다는 목적을 위해, 가장 완성된 구조이니까요."

"완성된 구조, 란 말이지."

" 그렇답니다. 실제 기록을 보더라도, 이 1만 2천년간 계속 그런 걸 반복하고, 이 땡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었어요. 전력으로 싸우면 부서져버리는 여린 낙원.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저 나태함에 젖어 타락할 뿐...... 그렇기에 저희들은 이변에 가까운 것을 일으키고 해결하여, 끝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의 평화로운 해결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정말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잘도 질려하지 않는걸."

"모든 분들께서 매번 여러가지로 취향을 바꾸시니까요. 누가 가장 재미있는 이변을 일으키는가를 경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요."


큭큭 웃는 318대째의 눈을 보자, 그녀도 이변 해결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이 애도 역시 하쿠레이의 무녀랄까, 환상향의 주민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태평스럽달까 넉살좋은 모습이랄까.'


그런 감상에 젖으며, 레이무는 '그럼' 하고 찻잔을 놓고 일어났다.


"슬슬 가볼게."

"어디로 말씀이신지요?"

"밖으로. 새전함 쪽에서, 기다려."

"기다린다, 하심은."


318대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역시 초대님이시네요. 벌써 대강의 이야기는 알아내셨다는 거로군요."

"뭐, 일단은. 내가 달성한 위업이란 것도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충은 이해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무는 진절머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대대손손 내 이름을 물려받을 정도로 경애하지는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싫으신 건가요."

"무거워서 싫다구. 거기에 뭐랄까, 대응하기도 힘들고."


그렇게 말한 뒤, 아, 그래서인가, 하고 레이무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걸 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석은. 괴롭히기라도 할 생각이려나."

"그런 건"


말하면서 318대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뭐, 적당하게."

"저는 잠시 용무가 있으니, 두 분의 방해는 하지 않을테니까요."


신경을 써 주는 일에 생색을 내는 녀석이구나, 싶어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무는 "응, 뭐, 아무래도 좋지 않겠어." 라고 답한 뒤, 신사의 밖으로 나왔다.

새전함 앞의 계단에 기대어 경내를 바라보았다. 1만 2천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광경이었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갔을 텐데.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어.'


이런이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레이무는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멋진 새전함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아마도 함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예전과는 상당히 다르리라 생각되지만.


'.....318대째 하쿠레이 레이무님은 꽤나 인기가 많아 보였고, 새전도 잔뜩 들어있겠지.'


열받으니까 나중에 조금 실례할까, 하고 불온한 생각을 했을 때, 레이무의 귀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 누군가가 돌계단 위로 올라오는 경쾌한 소리.


'왔나.'


어울리지 않게, 조금 두근거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저쪽 입장에서 보자면 1만 2천년만에 보는 거니까.


'애초에, 저쪽은 어떤 모습으로 만나러 오는거야? 설마 울면서 껴안는다던가 하려나.'


만약 그런 걸 하려 든다면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역시 울어야 할까. 아니면 그 우는 얼굴을 손가락질 하면서 있는 힘껏 비웃어 주는 쪽이 더욱 자신다워서 상대방도 기뻐할까.


'아아, 나 참 복잡하다 복잡해.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사람들 반응에 신경쓰는 거 자체가 전혀 나답지가 않은데말야.'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어쨌든 첫 경험이다.

1만 2천년간, 계속 자신을 잊지 않고 기다려준 사람과 이제부터 재회하는 거니까.


'망했네. 엄청 두근거리고 있어. 이쪽은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여름 햇빛의 푹푹 찌는 더위에 어울리지 않는 흑백의 복장을 입고, 어께에 빗자루를 걸치고, 모자를 눈까지 눌러 덮어쓰고서.

토리이를 지나 오는 그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레이무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걸어온 뒤, 그곳에서 딱 멈춰 섰다.

그리고,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올린 뒤,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여어, 레이무. 놀러 왔다구."


1만 2천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건, 틀림없는 키리사메 마리사 본인이었다.






<계속>







 

작가의 말



1만년 하고도 2천년 전에서 어떻게 된건지.


왠지 그런 느낌의 이야기.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법 한 것을, 제 나름대로 써 보았습니다.

누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써 나가겠습니다




-aho- 

 

 

 

Posted by 청전Lumius
,

본 번역물은 동방창상화의 aho 작가의 작품을 작가의 허락을 받아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글의 저작권은 aho 님에게 있으며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줄 간격은 원작의 줄 간격에 맞춰 띄우고 있으므로 조금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전Lumius-

원작 URL - http://coolier.sytes.net/sosowa/ssw_l/60/1221980424

원작 투고 시기 - 2008년 9월 21일 

 

 

 

 

 

───모든 마계인의 조물주이시자 위대한 마계의 신 신키님께 삼가 아룁니다.

훈훈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 앨리스 마가트로이드는


여기까지 적고 나서 앨리스는 편지지를 꾸깃꾸깃 접어서 뒤로 던져 버렸다. 곧바로 둥실둥실 날아온 한 인형이 쓰래기를 양손으로 잡아 휴지통까지 갖고 갔다.


'뭔가 아니란 말이지. 좀 더 이런'


펜을 잡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 없이 생각하기를 수십초. 앨리스는 천천히 다음 편지지를 꺼내서 얼굴을 찌푸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전략, 영원​한 마계의 신이시며 세상에 견줄 이가 없는 신키님


편지지가 다시 한 번 종잇조각으로 변했다. 뒤로 던지자 인형이 다시 휴지통으로 버리러 갔다.

 

'그러니까 아니란 말야. 좀 더 이렇게, 간소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시적으로 마계인을 칭송하는 표현할 수는 없는 걸까. 너무 길게 늘어지거나 너무 어려운 말을 썼다고 느껴도 별로 좋지 않고.'

 

거기서 문득,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다음 편지지를 꺼내 팬 끝을 가져다 대었다.

 

'가능한 한, 그래, 극단적으로 간소하게........'

 

───엄마에게

 

편지지가 갈기갈기 찢어져서 눈처럼 흩날렸다. 인형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열심히 종이조각을 회수해 간다. 그 옆에서 앨리스는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책상에 엎드렸다. 불이 날 정도로 얼굴이 뜨거웠다.

 

'뭐가 -엄마에게- 야! 몇 살짜리 애도 아니고, 아 부끄러워. 거꾸로 생각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쳤단 말야! 이 나이에 '엄마에게'라니! 이런 걸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날에는 부끄러워서 죽을지도 모른다구!'

 

너무 부끄러워서 흘러나온 눈물을 닦고 머리를 들었다. 책상에 난잡하게 뿌려진 종이조각을 필사적으로 모으고 있는 인형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래 한숨이 나왔다.

마 법의 숲에 있는 마가트로이드 저택의 2층, 침실 겸 서재에서 앨리스는 이래저래 두 시간 정도를 팬을 잡고 책상과 씨름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직후부터 시작했는데 어느새 오후의 티 타임 시간이 돼 버렸다. 지금쯤 홍마관에선 흡혈귀 아가씨가 '후후, 오늘도 좋은 향기네. 얼 그래이구나.''아니에요, 다즐링입니다 아가씨.' 같은 우아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자기는 이게 뭔가.

 

'정말, 뭘 하고 있는걸까.'

 

마법의 숲에 집을 짓고 사는 인형사, 앨리스 마가트로이드라는 자가 겨우 편지 한 통을 쓰는 데에 편지지를 30매나 써 버렸다. 그것도 심지어 3줄 이상을 넘긴 건 한 장도 없었다.

 

'어머니...... 가 아니라, 신키님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마계에서 환상향으로 이주한 지 벌써 수 년. 내가 이젠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한 명의 제대로 된 마법사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앨리스는 흘낏 방의 침대에 눈을 돌렸다. 그 아래 가장 깊숙히 숨겨진 큰 상자에는 여태까지 마계에서 온 편지가 대량으로 들어 있었다. 발신인은 전부 같았다. 마계인인 앨리스의 창조주이자 마계라는 세계 전체의 신인 신키였다.

마계의 신에게서 받은 편지, 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캐일이 크고 읽기 거북한 내용을 상상하겠지.

 

'하지만, 아니란 말이지.'

 

앨리스는 혼자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종이를 잡았다. 그것은 바로 어제, 어떤 짐과 함께 보내져 온 신키로부터의 편지였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사랑하는 앨리스쨩. 엄마란다. 잘 지내고 있니? 감기는 걸리지 않았니? 앨리스쨩은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까 밤에는 따뜻하게 하고 자는거야. 이 닦는 건 잊지 말도록.

아, 맞아. 앨리스쨩은 인형처럼 귀여우니까 이상한 사람에게 노려지지 않을까봐 엄마는 엄청나게 걱정된단다.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도 문을 열면 안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느낌으로 열 장 가량. 읽어나가다 보면 얼굴이 엄청나게 당기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이런 편지가 오는 건 물론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기는 커녕 거의 매 주 온다. 편지는 뭔지 모를 선물과 같이 올 때도 있었고 심할 땐 양 팔로 끌어안아야만 할 정도의 크기인 나무상자에 달짝지근한 과자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환상향에서의 주소를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제 와서는 반쯤은 진심으로 후회도 하고 있었다.

 

'난 열살짜리 어린애가 아닌데 말야.'

 

지금도 마계에서 신으로 있는 어머니의, 위엄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천연덕스러운 웃는 얼굴이 생각나서 앨리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야 어머니..... 가 아니라, 신키님은 마계를 만든 장본인이고 나보다 몇천, 몇 만 배는 살아왔으니까 내가 열살이건 스무살이건 딱히 다른 느낌은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그 렇다고는 해도 언제까지나 '앨리스쨩, 앨리스쨩' 하고 어릴 때랑 똑같이 불려지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진다. 인형사로서의 목표인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인형 만들기'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요즘, 불안은 한층 더 심해진다.

 

'거기다가 편지 한 통도 만족스래 쓸 수 없다니. 아아 안되겠어, 안돼, 못해.'

 

책상에 뺨을 붙이고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요즘 왠지 한숨이 많아진 느낌이 든다.

그 때 문득 창문 너머 하늘에 검고 작은 점이 생긴 것을 깨달았다.

 

'어라, 혹시.'

 

창가로 다가가서 지긋이 바라보는 사이에 점은 점점 커지다가 마지막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왓, 역시 마리사잖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잘 알고 있는 친구라는 걸 확인하고 앨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키리사매 마리사. 앨리스와 같은 마법의 숲에 사는 인간 마법사다. 입버릇은 '화려하지 않으면 마법이 아니야. 탄막은 화력이라구.' 이며 기교를 중시하는 인형사인 앨리스와는 정반대인 소녀다. 


그런 신조의 차이라던가, 앨리스가 마계에 있던 시절에 벌어진 작은 싸움 때문에 환상향으로 처음 왔을 때는 견원지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변 때의 탄막승부를 계기로 조금씩 대화를 하게 됐고, 최근에는 같이 이변해결을 하거나 홍차를 마시면서 마법에 관해 잡담이나 토론을 하며 나름 좋은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든지 대환영!- 이란 말은 아닌데 말야'


앨리스는 당황하면서 책상 위를 정리했다. 편지지와 어머니로부터의 편지를 한꺼번에 서랍 안에 넣었다. 이런 걸 마리사에게 보였다간 한 달은 놀려먹을 게 틀림없었다. 

정리를 마치고 재빨리 계단으로 1층으로 향했다. 난간에 손을 대는 순간에 문 밖에서 쓸데없이 큰 소리가 들렸다.


"어~이, 앨리스 없냐~? 없으면 멋대로 들어간다~?"

'들어오지 마!'


마음 속으로 태클을 걸며 앨리스는 계단을 내려가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그 앞에 마리사가 손에 미니 팔괘로를 이쪽으로 향하며 정말 즐거운 듯이 씨익 웃고 있었다.

 

 "여어, 일어나 있었냐.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자고 있는게 아닌가 했다구."

"너는 사람을 깨우는 데 집 1층 전부를 날려버릴 생각이니?"

"좋은 알람소리잖아. 내 마법은 화려하니까 말야."

 

마리사가 주늑든 듯 말했다. 앨리스는 이마에 손을 대며 고개를 저었다. 이 악우는 항상 이런 식이다. 어설프게 대처했다간 진짜로 1층을 날려버릴 것 같아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왜 그래 앨리스, 머리라도 나쁜거냐?"

"아픈거냐? 겠지."

"딱히 다를 것도 없잖아. 아무래도 좋으니까 좀 들여보내 줘. 서서 얘기하면 지친단 말야."

"여전히 크게 나오는걸."

"큰 건 좋은 거야."

"키는 내 쪽이 더 큰데?
"그럴 때는 인간으로서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를 비교해야지."

"그런 거라면 내 압승이잖아."

"역시 머리가 나쁘구만."

 

언제나처럼 서로 비꼬면서 두 사람은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주고 받는 것도 이미 익숙해졌다. 마리사는 전혀 거리낌없이 응접실 중앙의 의자에 털썩 앉아 허리를 숙이고 눈앞의 테이블에 턱을 괴며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이 가게에선 손님에게 차 한잔도 주지 않는 듯 하구만."

"주문하는 게 너무 빠르다니깐. 그리고 가게도 아니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리사의 반대편에 앉으며 앨리스는 인형을 조종해서 홍차를 준비시킨다. 집안일 같은 건 훈련을 겸해서 인형에게 시키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이다.


"엇차, 오늘따라 앨리스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는데."

"엣? 뭐가."


말하고서 '실수다' 하고 생각했다. 웃음짓는 마리사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큰 상자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준비가 꽤 좋잖아. 다과용 쿠키를 준비해 놓다니 말야. 어디, 빨리 하나 먹어 볼까."


이쪽의 허락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마리사는 상자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안에서 꺼낸 쿠키 하나를 집어먹더니 눈을 찌푸렸다.


"이거, 평소에 먹던 거랑은 맛이 엄청 다른데. 너무 달아. 뭐야, 실패작이야?"

"아무래도 좋잖아."


속으로는 안달하면서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앨리스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마리사는 계속해서 쿠키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이건 진짜로 단데. 설탕을 너무 많이 넣었어. 이런 걸 먹었다간 순식간에 뚱돼지가 될 거라구."

"불평을 하는 것 치곤 꽤나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응, 이 단맛도 익숙해지면 습관이 될 것 같다구."

"익숙해지는 게 너무 빠르잖아."

"묘하게 그리운 맛이란 말이지."

"응?"

"아.... 아냐. 아무것도."


마리사가 얼버무리듯이 웃었다.

티 세트를 갖고 날아온 인형이 컵에 홍차를 부을 즈음에는 마리사의 입가엔 과자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거 너무 달긴 한데 맛있구만. 실패작으로 두기엔 아깝다구."


만족으러운 웃음으로 찻잔으로 손을 뻗는 마리사를 보며, 앨리스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실패작이라고 연신 말하던 이 쿠키는, 사실 편지와 같이 온 신키가 보낸 것이었다.


───앨리스쨩이 엄청 좋아하는 쿠키를 간만에 구워서 편지랑 같이 보낼게. 맛이 예전보다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그런 한 마디가 덧붙여져서 온 쿠키의 맛은 신키의 걱정에 비해 너무나도 예전과 같은 맛이었다. 즉, 어린애들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예전에는 신키님이 이걸 만들어 주면 기대하고 있었지. -엄마, 쿠키 먹고 싶어요! 엄마 게 아니면 싫어!- 라며. 유메코가 어이없어한 이유, 이제라면 알겠어. 진짜 너무 달아.'


보 내온 쿠키를 한 개 먹으며 앨리스는 얼굴을 찌푸렸었다. 도저히 전부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지 않고 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거실 테이블 위에 방치해 두고서 그대로 잊어버렸던 것이다.


'설마, 이 엄청나게 단 쿠키가 마리사의 마음에 들 줄은 몰랐지만.'


눈 앞에서 홍차를 홀짝이며 행복한 듯이 쿠키를 집어먹는 마리사를 보며, 앨리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신키가 구운 쿠키가 악우의 입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걸 보며, 조금 초조해졌다. 혼자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어서 곤란했으면서도 이대로 전부 먹게 두는 것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리사의 손을 멈추기 위해 이야깃거리도 없는데 입을 열었다.


"너 말야."

"엉?"

"잘 모르겠어."

"뭐가?"

"아니, 그 뭐냐. 그, 일식을 선호하면서 쿠키 같은 건 엄청나게 좋아하고. 다과로 내놓으면 언제든지 전부 먹어 버리잖아. 케이크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정말 아무래도 좋은 말을 해 버렸어, 라고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의외로 마리사는 뭔가 아픈 부분을 찔린 듯이 쿠키를 먹으면서 눈을 돌렸다.


"아니, 딱히 그런 게 좋다는 건 아니야."

"그래? 하지만 지금도 엄청 빠르게 먹고 있는걸."

"그렇지도 않잖아. 애초에 너는 쿠키 이외엔 꺼낸 적이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쿠키 이외에는 네가 불평을 늘어놓잖아."

"아, 으응."


대화를 계속하면서도 마리사는 쿠키를 계속 먹는다, 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얼굴을 빛내며 몸을 내밀었다.


"아, 맞다. 그런 것보다 말야, 들어봐. 빅 뉴스가 있어."

"뭔데."

"헤헷, 뭐라고 생각해?"


반 사적으로 "그런 거 몰라" 라고 대답해 버릴 것 같아서 앨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저편의 마리사의 웃는 얼굴이 정말 순진하게 즐거운 듯이 보인다. 만난 뒤로 그녀의 표정이나 음색, 말투 등을 행각해 보면 오늘은 전체적으로 꽤 기분이 좋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는 건, 그거겠지.'


그 빅 뉴스라는 것에 대한 짐작이 가서 앨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다. 혹은 여태까지 쓰던 마법을 개량하는 것이 잘 됐다."

"유감, 틀렸어!"

"응? 아니야?"


아까까지 답이라 확신했었던 만큼 앨리스는 놀랐다. 마리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몇 장인가의 종이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이게 뭐야?"


앨리스는 놓인 종이 중 하나를 잡았다. 선명한 색의 탄막이 종이 가득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지금 눈앞에 있는 친구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아아, 그 텐구가 찍은 탄막 사진이잖아."

"그 말씀대로. 복사해서 받았어. 잘 찍혔지?"

"너도 참 별난 걸 좋아하는구나."


어 이없어하며 다른 사진을 보았다. 이것이고 저것이고 마리사의 탄막을 찍은 사진밖에 없었고, 앨리스에겐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파올 것만 같은 화려한 탄막만 있었다. 그렇다고 할까, 정말로 눈이 따끔따끔 아파와서 사진에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테이블 저편의 마리사는 진심으로 기쁜 듯 한 웃음을 짓고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화려하지, 아름답지. 요괴의 산은 물론이고 사람 마을에서까지 인기가 끝내준다고 하더라구!"

"다들 취미가 이상한데."


홍차를 홀짝이며 주는 핀잔에도 마리사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기쁜 듯,


"헤헷, 이걸 보면 누구라도 감동해서 -꺄아~ 마리사아앗!--환상향 최강의 마법사~!--나도 마법을 쓰고싶어~!- 하게 될 게 틀림없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동업자가 늘어서 숲이 더 줄어들거야."

"그렇지, 좁아지겠지.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탄막을 보면 어떤 녀석이라도 마법을 엄청 좋아하게 될 게 틀림없다구! 잘 됐잖아 앨리스, 혼자뿐인 너에게도 이제 살아있는 친구가 생길 수 있다구."


기 분이 고양된 걸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는 마리사를 보며 앨리스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밉살스러운 말만 쏘아붙이는 삐뚤어진 녀석인 주제에, 이런 때에 보이는 모습은 정말 순진하고 솔직하다. 이것저것 주변에 폐를 끼치는 일을 벌이거나, 도둑질같은 걸 계속하면서도 그녀가 완전히 미움받지는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겠지.

그건 앨리스에게도 마찬가지로, 매번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폐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이런 붙임성있는 면을 보이면 결국엔 '어쩔 수 없네' 라며 한숨을 한 번 쉬는 걸로 용서해 줘 버리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슬슬 쿠키 먹는 건 그만둬 줬으면 하는데.'


이대로는 정말로 전부 먹혀버릴 것 같다며 앨리스가 걱정하고 있을 때, ​마리사는 드디어 손을 멈췄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혀로 입 주변을 햝았다.

 

"후~, 배부르구만. 잘 먹었어."

"그래 그래."

 

홍차를 홀짝이는 마리사를 바라보며, 앨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다행이다, 아직 반 정도는 남았어. 아니, 내가 먹는 건 좀 그렇지만.'

 

마음을 놓을 일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자 홍차를 다 마신 마리사가 다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진짜 맛있구만! 좋아, 정했다. 이 실패작을 갖고가서 내가 '키리사메 마법점'의 상품으로 써 주겠어!'

"에엣!?'


무심코 목소리를 올려 버려서 마리사가 이상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 실패작이잖아, 이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평소랑 맛도 너무 다르고, 이런 달달한 쿠기를 일부러 구운 건 아닐 거 아냐."

"아니, 그건...... 애초에 마법점에 쿠키라니, 무슨 소리야."

"괜찮잖아. 남의 가게에 쪼잔하게 굴지 마."

"벌써 자기 것처럼........ 애초에 말야, 그 가게 자체가 개점휴업상태잖아. 이제 적당히 문 좀 닫아."


물건이 어지러지다 못해 계산대마저 보이지 않는 마리사의 가게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쁜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하든 내 마음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게로서의 모습조자 갖추지 못하고 있잖아."

"그 말투는 뭐야. 열받는데."


마리사가 아까와는 달리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앨리스는 더욱 불만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화내고 있는 악우의 얼굴에서 어딘가 모르게 진심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평소에 화내던 거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언짢은 듯 했다.


'이상하네.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했나, 내가.'


다시 생각해 봐도 평소랑 같은 빈정거림의 반복이랑 별로 다르지 않은 대화였던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사가 기분나빠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걸로 진심이 돼서 싸우게 되는 건 바보같다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애초에, 딱히 그 쿠키는 그렇게까지 소중한 게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집착을 가질 이유도 없고 말야. 응.'


오히려 여기서 한 발 물러나 주는 게 성인 여성이겠지.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며 앨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렇지, 확실히 네 자유야."

"우왓, 앨리스가 묘하게 솔직하다구. 기분나빠."

 

마리사가 기분나쁜 듯 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로 실례하는 녀석이네, 라고 생각하며 앨리스는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네가 사과한다면 용서해 주겠지만, 뭐가 그렇게........ 아, 그렇다는 건."

 

마리사가 씨익 웃으며 다시 쿠키 하나를 집어들었다.

 

'실패작인데도 내가 칭찬하니깐 부끄러워졌던 거구나. 하지만 유감이야. 이건 이제 내 거야. 너에겐 하나도 안 줄 거라구."

"그런 거야 아무래도 별 상관 없지만."

"아~니, 거짓말이야. 아까 내 마법가게에 불평할 때 네 눈은, 누군가가 떨어뜨린 1엔 동전을 봤을 때의 레이무와 같았어."

"뭣, 그렇게나 심했어!?"

 

앨리스가 너무나도 놀라 일어나자 마리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심했어. 그럼."

 

짓궂게 한쪽 눈만 떠 보인다.

 

"냉큼 불어보실까. 이 쿠기에 어떤 비밀이 있는거냐. 앙?"

"딱히, 비밀 같은 건."

 

앨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잘 생각해 보면 별로 숨길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숨기고 나중에 사실이 알려지면 그 쪽이 더 데미지가 클 것 같았다.


"그 쿠키 말야."

"오, 벌써 자백하는거냐. 또 솔직한 앨리스구나."

"난 너보다는 훨씬 솔직하게 있을 셈이야. 그래서, 그건, 그."


볼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앨리스가 말했다.


"....... 우리 어머니가 보낸 쿠키야."

"....... 어머니?"


움직임이 멈춘 마리사가 먹다 남은 쿠키를 한 손에 들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앨리스는 끄덕였다.


" 그래. 너도 일단 알고는 있잖아. 마계의 창조신, 신키님. 뭐, 별로 배가 아프면서 날 낳았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엄마 같은 사람이니까, 어머니. 그래서 그 쿠기, 너무 달아 도저히 못 먹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버리는 건 좀 아니고."


묘한 부끄러움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단숨에 얘기하고 나서 앨리스는 문득 깨달았다.

마리사의 표정이 다시 언짢은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아까와 같은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 입술을 씰룩거리며 삐진 듯 한 표정이다.


"흐~응. 그런가. 즉, 사랑하는 엄마의 쿠키를 가져가 버리는 게 아까웠단 말이네."

"따, 딱히 그런 말이 아니고."

"이제 와서 숨기지 마."


재미없다는 듯이 말하고, 마리사는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상자에 도로 넣고 뚜껑을 닫은 뒤, 던지듯 밀쳐 놓았다.


"반납할게."

"엣, 그치만....... 것보다 너 먹던 걸 도로 집어넣었지."

"그런 거 아무래도 좋잖아. 자, 도로 가져가라니깐."

"왜 그래."

"이런 달아빠진 쿠키, 먹을 수 있을까보냐."

"뭐? 하지만 아까는........ 것보다 반 이상이나 먹어놓고 그런 말을 한들."

"모른다고, 그런거!"


마리사는 느닷없이 소리치고,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쿠키 상자를 내리치듯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난 너같은 어린애들 것 까지 가져갈 정도로 나쁜 놈이 아니란 말야!"

".........뭐엇!?"

 

앨리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찻잔이 흔들려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것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고함쳤다.

 

"누가 어린애야!?"

"어린애잖아. 그 나이에 마마의 쿠키 같은 거나 받고 해벌래 하고 말야!"

"그런 적 없어!"

"아니, 해벌래 했어! 와~아, 마마가 만든 쿠키다, 에헤헷, 앨리스만 먹을꺼다, 마리사에겐 안줄꺼라구, 라고 말야!"

"그건 대체 누구 흉내야!?"

"당연히 너지! 싫어엇-! 마리사, 마마가 만든 쿠키 가져가면 싫어엇. 돌려주지 않으면 앨리스는 울어버릴꺼야앙, 후에엥, 하면서 말야!"

"너어엇.......!"

 

앨리스는 까득 이를 악문다. 역시 옛날에는 '우후후', 이라던가 '꺄하하' 라는 소리를 실제로 내며 웃던 여자다. 탱탱 튀는 말투가 정말 능숙해서 열받는다.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어!"

"아니, 네 눈이 그렇게 말했어!"

"안했어!"

"아니, 말했어! 어쨌든, 이런 건 필요없어! 애써 나 없는 곳에서 혼자 사랑하는 마마의 맛이나 보라구! 다음엔 다른 녀석에게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거야, 앨리스쨩."

 

진심으로 바보 취급하는 말투로 쏘아붙이고 나서, 마리사는 앨리스에게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빗자루를 한 손에 들고 재빠르게 일어났다.

 

"잠깐, 어딜 가는거야!"

"당연히 돌아가는 거지. 이런 과자가 있는 집에 더 있다간 나까지 유치함이 옮을 거라구. 아~ 싫다 싫어. 마가트로이드는 마마의 맛, 이란 거구만."

 

뜻은 모르겠지만 이쪽을 바보취급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노래를 부르며 마리사는 기세 좋게 현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려, 이.......!"

 

이 대로 당하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낼까보냐, 라는 생각에 쫓아가던 앨리스는, 그러나 입구에서 두세 걸음 쯤 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인지, 마리사가 빗자루를 잡은 모습 그대로 날아오르지도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너 말야."

 

잠시 눈을 피했다.

 

"적은거냐."

"뭘 말야."

"감사 편지인게 당연하잖냐. 마마에게서 쿠키를 받았으니까 말야."

"너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잖아"

"흥, 그런 말 하는 걸로 봐서는 내가 오기 전까지 적고 있었겠구만. 왠지 2층에서 부산떨기도 했었고 말이지."

"보, 보였었어!?"

"당근, 봤고 말고. 그래서, 다 쓴거냐. 어차피 '엄마에게' 라던가 섰었겠지."

"너하고는 상관 없잖아."

"그 말은 아직 쓰지 않았단 거구만."

"으......."

 

잠시 죄책감을 느끼며 조금 눈을 돌리자, 마리사는 힐끗 이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

"뭐라고!?" 

"마마의 쿠키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주제에, 고맙다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잖아. 자기만 좋으면 된거지. 아~, 이러니까 어린애는 안된다니깐."

"너, 너에게만큼은 그런 소리 듣고싶지 않."

 

앨리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마리사는 하늘로 날아올라 있었다.

 

"잘 있어라 앨리스. 마마에게 답장 제대로 하라고."

 

그 말을 남기고서,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아갔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앨리스에겐 쫓아갈 방법이 없다. 하고픈 말만 다 하고 돌아가 버린 흑백의 모습을, 이를 갈며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뭐야, 저녀석!"

 

그렇게 내뱉으며, 앨리스는 현관 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마리사에게 엄청나게 바보 취급 당한 다음날, 앨리스는 2층의 서제 겸 침실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오늘대로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아침부터 점심을 넘은 지금까지, 거의 100매 이상의 편지지가 종이조각으로 변했다. 휴지통 담당인 인형은 힘껏 분투했다.

 

'어떻게 하지. 뭘 써도 어린애처럼 보여.....'

 

간소한 표현은 물론이고 중후한 표현까지 어린애가 어께 너머로 배운 글로 쓴 문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아.

 

'마리사 때문이야.'

 

책상에 고개를 숙인 채, 앨리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마리사가 했던 언동이 생각날 때마다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났다.

 

'난 어머니의 쿠키로 그렇게까지 기뻐한 적 없는걸. 되려 답장쓰기만 귀찮고 선물은 처리하기도 곤란하고, 민폐란 말야.'

 

그런 걸 생각했더니 신키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앨리스는 다시 크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엄마가 나빴던거야. 마계의 신이면서 정말이지 위엄도 없고 딸에게 딱 붙어 살고 머릿결은 억세지. 정말, 이제 슬슬 딸들에게서 독립해 줬으면 한단 말야.'

 

앨리스는 책상 구석에 손을 뻗었다. 거기엔 어제 있었던 말싸움의 원인인 쿠키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대로 1층에 놓아두는 건 왠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갖고 온 것이다.

뚜껑을 열고 쿠키를 하나 꺼내 먹어 보았다. 무심코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달았다.

 

'봐, 지금의 내 입맛엔 맞지 않는걸. 난 이미 오래 전에 부모로부터 독립했단 말야. 이런 걸 좋아라 하면서 먹다니, 마리사 쪽이 훨씬 어린애잖아.'

 

어제 그렇게 말했으면 됐을걸, 하고 지금 후회했다. 앨리스는 뚜껑을 덮은 쿠키 상자를 다시 책상 구석에 밀쳐넣고 팬을 쥐었다.

 

───삼가 아룁니다. 마계의 신, 신키님

───편지 감사히 받았습니다. 이쪽은 변함없습니다.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이걸로 됐어. 그래. 양쪽 다 어른인걸.  이 정도 쌀쌀한 건 당연한거야."

 

억 지로 그렇게 투덜대고서 팬을 놓았다. 책상에 팔을 괴고 다 쓴 편지를 바라보자 엄마의 유감스러운 듯이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래, 분명 엄마는 이 편지를 보고 웃으시겠지. 화내거나 울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지는 않으실 것에 틀림없다.

 

'.......엄만 무슨 생각으로 이 쿠키를 구웠을까.'

 

분명, 옆에서 유메코에게 혼나 가면서, 최선을 다해 구웠겠지. "앨리스쨩, 기뻐해 주려나.""엄청 싫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그럴 리 없어, 앨리스는 좋은 애인걸." 같은 말을 하면서.

 

'이제 와서 이런 걸 보내버려도 곤란할 뿐인데.'

 

지금까지의 편지에 대한 답장도 전부 이번 것처럼 쌀쌀맞은 느낌으로 보냈었다. 신키는 답장이 올 때 마다 유감스러운 웃음을 지었겠지. 그걸 생각하자 조금은 가슴이 아파졌다.

 

'이걸로 된 거야. 이게 보통이니까.'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던 앨리스는, 어떤 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어?'

 

앨리스도 일단은 마법사이므로, 당연히 집에는 마법을 이용한 방범을 위한 다양한 조치가 돼 있었다. 집 주변을 둘러서 있는 마법의 실도 그 중 하나로,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그 기척을 감지해 주도록 돼 있는 것이다.

 

'뭐, 마리사 같은 녀석 상대로는 이정도 보안은 의미도 없지만'

 

앨리스는 창가로 다가가서 슬쩍 밖을 보았다.

숲 의 입구, 즉 사람의 마을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으며 날아올 기색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앨리스가 주변에 쳐 놓은 마법의 실을 눈치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보통의 인간인 듯 싶다.

 

'손님, 이려나.'

 

앨 리스의 집은 마법의 숲 중에서도 비교적 사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버섯의 포자도 그렇게 농밀하진 않았으므로 가끔 이렇게 인간이 긿을 잃고 들어오기도 한다. 대부분은 식용 버섯을 채집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별일이네. 저 사람은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날씬한 모습의, 치마를 헐겁게 입고 조금 수수한 벌꿀 색의 머리를 완만하게 묶은​ 여자였다. 손에는 작은 가방이 하나. 도저히 숲으로 오는 모습으론 보이지 않는다.

더욱 이상한 건, 헤메이는 느낌 없이 곧장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 집을 목적지로 잡은 듯 싶었다.

 

'혹시,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축제 때 인형극을 공연한 걸로 인해 앨리스는 인간 마을과도 다소 교류가 있는 편이었다. 그녀의 인형 만드는 솜씨를 보고 일을 부탁하러 오는 사람도 적지만 몇은 있었다.

과연 이 여자는 앨리스의 집 앞으로 와서 멈추었고, 어두운 숲과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저택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도중에 버섯의 포자를 들이마시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손을 덮고 몇 번인가 기침을 한다.

앨리스가 1층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현관 문에서 겸손한 노크가 들렸다.

 

"누구신가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앨리스는 문 너머로 물어봤다. 몇 번의 기침 후에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저기, 여기가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씨 댁이 맞는가요."

"네, 그런데요."

"길을 잃어버려서......... 잠시, 쉬어가게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람이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씨 댁이 맞는가요' 라고 했다.

 

'수상하네.'

 

앨리스는 만일을 위해 인형들을 주변에 배치시켜 놓으면서 문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다시 한 번 문 저편에서 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역시 아까 보았던 부인이 양 손에는 가방을 들고서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냥 보면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자,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여자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자 좀 병약하면서도 조용하고 품격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인간 마을 중에서도 상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겠지, 하고 앨리스는 짐작했다.

 

'부잣집 마님, 이라는 느낌이려나.'

 

그렇다고 한다면 더욱더 이상하다. 그런 신분의 사람이 어째서 이런 곳으로 왔단 말인가.

어제 마리사가 앉았던 의자를 부인에게 권하고 자신도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하면서 앨리스는 부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선반에 놓여있는 인형 중에는 특제도 몇 개인가 있다. 그 인형의 눈에 심어놓은 마법석으로부터 시각 정보를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상대의 전신을 관찰해 보았지만 역시 특별하게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냥 사람보다도 약해 보여.'

 

그러는 사이에 인형이 홍차를 내어 왔다. 부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다시 기침을 한 번, 두 번.

 

"감기에 걸리신 건가요."

"아니, 다른 거에요. 죄송합니다."

 

사과하면서 다시 몇 번 기침을 했다. 앨리스의 앞에도 홍차를 놓고, 인형이 탁자에서 벗어날 즈음, 간신히 기침이 멈췄다.

 

'어떻게 할까나.'

 

 앨리스는 고민했다. 타인의 사정에는 애초에 별 흥미가 없었다. 자신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 않다면, 굳이 캐물어 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탁자 반대편의 부인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어온 홍차에 손도 대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앨리스는 내심 어께를 움츠리며 말없이 홍차를 홀짝였다. "잠시 쉬어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들은 체면에, 그렇게 크게 환영할 기분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겠지. 인형으로 가득 둘러싸인 이 집에서 나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위험한 존재로는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면 적당히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든 알 바 아니다. 그렇게 결론짓고 앨리스는 일어났다.

 

"저는 2층에 있을태니,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네, 실례하겠습니다."

 

부인은 그 말만 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앨리스 역시 아무 말 없이 다시 2층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아 인형의 옷을 꿰메며 1층에 있는 인형의 눈을 통해 부인을 관찰한다. 앨리스가 올라온 뒤로도 부인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집 주인의 눈이 사라진 때부터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지만.


'정말, 뭘 하러 온 걸까?'


부인은 가끔씩 기침을 하는 것 이외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날이 저물기 시작할 즈음에 멋대로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홍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 묘한 부인이 찾아온 건 이번 뿐이 아니라, 이 다음에도 2, 3일 정도에 한 번쯤 가방 한 개만을 들고 앨리스의 집을 방문해 왔다. 그 때마다 '길을 잃어서 그런데, 잠시 쉬었다 갈 수 있을까요' 라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앨리스 역시 그 거짓말에 대해 딱히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집 안에서 부인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내어 온 홍차에는 손을 대려 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는 거라곤 가끔 기침을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 조금 전에 말 없이 집을 나갔다.


'사람인데도,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그야말로 움직임이 정해진 인형 같았다. 자기 이외의 인형사가 육체에 대한 연구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보내온 건 아닌가, 하는 바보같은 추측도 반쯤 진심으로 믿고싶어질 정도였다.

앨리스가 그 가설을 완전히 부정할 마음이 든 건 부인이 몇 번째인가의 방문을 했을 때였다.

그 때는 우연히 1층에서 인형을 손질하고 있었고, 평소와는 달리 계속 거실에 있었다.

그 날 부인은 평소보다 많이 기침을 했었다. 그 기침이 서서히 심해지더니, 결국엔 의자 위에서 몸을 기역자로 꺾으며 괴로운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아무리 앨리스라도 그대로 둘 수는 없게 됐다.

하지만 "괜찮으세요?" 하고 당황하며 다가오는 앨리스를, 부인은 팔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건드리지 마세요!"


지금까지의 인형같았던 분위기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격한 움직임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멈춘 앨리스에게, 부인은 앗,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례했군요."

"아닙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죄송합니다. 감기가 옮으면 안되니까, 조금, 떨어져 있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앨 리스가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동안에도, 부인은 한동안 괴로운 듯 한 기침을 반복했다.뭔가 특별한 병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약을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녀가 처음 왔을 때, 감기가 아니라는 말을 했던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기침이 멈추고, 그녀는 가방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괜찮으신가요" 하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려던 앨리스에게 손바닥을 향했다.


"괜찮으니까, 가까이 오면, 감기가 옮아 버려요."


감기라고 하는 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뭔가, 앨리스가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있는 듯이 보였다. 어쨌든, 가까이 갈 수 없는 이상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부인은 조금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현관을 향했다.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대며 돌연,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보았다.

단아하지만 병들고 피로한 기색이 눈에 띠는 얼굴이 안도한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앨리스 씨. 당신, 아주 상냥한 분이시군요."


마치 그게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기쁜 일이라는 듯 한 미소였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앨리스는 알 수 없었다. 말없이 부인을 계속 바라보자, 그녀가 한 번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집을 나갔다.


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기묘한 것을 깨달았다. 왠지, 집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그녀의 발걸음이 제대로 돼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기분 탓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대체 뭐였던 걸까, 저 사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가오는 걸 팔을 내저으며 거부당했을 때는 미움받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까의 미소는 그런 상대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쪽이 싫다면 다 드러나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곳을 자주 방문할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저 부인을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하지만 확실히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고........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라도 있었던 걸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사람들이라곤 쓸데없이 씩씩한 녀석들 뿐이었고, 저런 병약하고 덧없어 보이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다음 날. 앨리스는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을 때 집을 나섰다. 가는 곳은 인간의 마을. 가까운 시일 내에 벌어지는 축제에서 항상 하던 인형극을 공연하기로 돼서 축제의 실행위원과 미리 계획을 맞추어 놓아야 했다.

인형에게 세세한 움직임을 시키며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건 인형사에겐 좋은 훈련이 된다. 무엇보다 앨리스 자신이 인형극을 좋아했으므로 사람 마을에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인형극이라. 옛날엔, 어머니께서 해 주셨었지.'


인 형극이라곤 해도 신키가 앨리스에게 보여준 건 봉제인형 안에 손을 넣고 하는 것이었다. 멋있는 마계의 신 신키와 그 딸 앨리스가 힘을 합쳐 나쁜 마왕을 쳐부순다, 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앨리스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었고, 신키는 물론 악역으로 등장했던 유메코와 마이, 유키도 나름 즐거운 연극을 했었다.


'하지만 가끔 어머니께서 폭주해 버려서, 자기가 자기에게 딴죽을 걸거나 했었지.'


현관 문을 닫아 잠그며 앨리스는 웃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경험이 인형사라는 자신을 만든 계기였던 것 같았다.


'그리운걸. 언제부터였더라. 그런 걸, 재밌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게.'


마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느낌이 들고, 그보다 전이었던 느낌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이제 그런 건 하지 않아도 돼요' 라고 말했을 때, 신키의 유감스러운 듯 한 미소.

앨리스의 가슴이, 따끔 하고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마리사가 안 보이네.'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악우의 불쾌해하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근에 방문한 사람은 부인 뿐으로 마리사는 요 보름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전에 있었던 일, 아직도 화나 있는 걸까. 아니, 객관적으로 봐서, 화내야 할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쪽인 것 같은데.'


───그 나이에 엄마가 만든 쿠키 같은 걸로 기뻐하기나 하고 말야!


"기뻐한 적 없어!"


반사적으로 소리친 후, 앨리스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에도 어두운 마법의 숲에는 아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틈새 요괴가 놀리러 올 기색도 없다. 그걸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이제 그런 어린애가 아닌걸. 어머니께 착 달라붙는, 어린애 마법사가 아니야. 인형극도 보는 쪽이 아니라 보여주는 쪽이고.'


마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며 앨리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딱히 탄막 승부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준비는 필요 최저한으로만 했다. 인형도 상하이와 호라이 인형 뿐.


'좋은 날씨네.'


버섯의 포자가 자욱한 마법의 숲이긴 하지만,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의 위로 올라가면 그곳에는 상쾌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기 본적으로 실내파인 앨리스지만 흡혈귀처럼 태양의 빛을 싫어할 정도로 비참한 감성은 갖고 있지 않았다. 딱히 서두르는 것도 아니었고, 조금 더 하늘 위의 산책을 즐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문득 아래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사?'


저 밑에서 나무 한 그루에 숨은 듯 한 마리사가 있었다. 그곳은 앨리스가 집에 있을 때 기척을 느낄 수 없기에 딱 알맞은 정도의 장소였다.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


고 개를 갸웃거리며, 앨리스는 마리사의 뒤쪽으로 내려섰다. 이 악우는 마법사이기에 기척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뒤를 돌아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일로 머리가 꽉 찬 것 같았다. 나무 뒤에 숨어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열심히 무언가를 엿보고 있었다.


'빈틈투성이네.'


어이없어 하며, 앨리스는 말을 걸었다.


"마리사"

"꺄앗!"


의외로 귀여운 비명소리를 내며 마리사가 날아올랐다. 그리고선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뒤돌아 보며 침을 튀기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보냐, 넌! 깜짝 놀랐잖아!"

"아니, 어느 쪽이냐 하면 눈치채지 못한 네 쪽이 얼빠져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지만."

"네 존재감이 너무 없는거야. 역시 환상향 제일로 친구가 없는 여자구만."

"공교롭게도, 이제부터 인간 마을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참이었어."

"그거 참 위험한데. 어서 에이린에게 연락해야겠어."

"아니, 망상 속의 친구가 아니라니까."


가벼운 야유를 주고받으며, 앨리스는 조금 안도했다. 마리사는 전에 해어졌을 때의 험악한 분위기를 가진 게 아니라, 평소처럼의 모습으로 보였다.


'뭐, 애시당초,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즘들어 영문을 모를 일뿐이네, 하고 내심 투덜대며, 앨리스는 질문했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엣? 아, 그....... 아무것도. 평소 하던 대로야."

"버섯 채집?"

"응, 뭐. 그런 거지."


마리사는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수상한걸.'


이 근처는 마법의 숲 중에서도 변두리 지역이라서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마을의 가족들이 등산을 하러 올 정도다. 그런 곳에서 희귀한 버섯은 나지 않는다. 애초에 아까 보았던 마리사의 자세는 아무리 봐도 버섯을 찾으러 온 사람이라곤 할 수 없었다.


"너, 뭔가 거짓말하지 않았어?"

"환상향 제일로 정직한 마리사 씨에게, 이 얼마나 무례한 아이란 말인가."

"그 말 자체가 이미 거짓말이잖아."

"시끄럽구만.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잖아. 그것보다, 그, 뭐냐, 그거야."


또 다시 마리사는 얼버무리듯이 양손을 뒤로 돌리고 꼼지락대며 머뭇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모자 아래의 얼굴이 조금 빨개진 느낌이 들었다. 기분나쁘네, 하고 속으로 한기를 느끼고 있자니, 마리사는 이쪽을 흘낏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썼겠지."

"응? 뭘?"

"답장일 게 뻔하잖아."


또 그 이야긴가, 하고 앨리스는 조금 싫증냈다.


'왜 그런 거에 집착하는 걸까, 마리사는.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약간 죄지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에 썼었던, 언제나처럼의 간략한 문장이 담긴 답장은 아직 마계로 보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보내지 않고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였다.

또 이상한 말다툼이 되려나, 하고 반쯤 포기한 채, 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뭐어엇!?"


아니나 다를까, 마리사는 말꼬리를 물어 왔다. 눈을 부릅뜨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 진짜 바보냐. 그 뒤로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거야!?"

"뭐, 뭐야. 딱히, 너하곤 상관없잖아."

"시끄러워. 됐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책상에 앉아 답장을 써. 아니, 쓰도록 해."

"대체 왜 그래."


안 그래도 답장이 잘 써지질 않아서 난처해 하던 참이었는데. 하고 생각하자 눈앞에 있는 악우의 말에 갑자기 화가 났다.


"도대체 왜 그래, 너."

"뭐야."

"왜 그렇게나 나에게 답장을 쓰게 하려는거야."

"네가 은혜도 모르는 말만 하니까 그렇지."

"만일 그렇다고 치더라도 평소의 너라면 그런 것 쯤은 신경쓰지 않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아, 아니, 딱히, 난....."


말문이 막힌 듯이 우물거린 후에, 마리사는 조금 눈을 돌리며, 바보 취급하듯이 입을 삐쭉댔다.


"애, 앨리스쨩은 아직 엄마가 사랑스러운 어린애니까."

"또 그런 소릴 하고.......!"

"사실이잖아. 자아 앨리스쨔앙, 제대로 답장을 적지 않으면 마마가 걱정해버려요옷~. 자기 전에 이를 닦고, 모르는 아저씨에게 사탕을 받아도 따라가면 못써요오~"

"너 말야......!"


어린애 말투까지 써 가며 있는 힘껏 앨리스를 바보취급한 뒤, 마리사는 도망치듯이 빗자루에 올라탔다.


"뭐, 그렇다는 거니까. 어서 답장 써라."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빨리 답장 안하면 마스터 스파크로 너네 집을 날려버리겠어. 그럼 이만."


그 말을 툭 던지고, 재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라간다. 앨리스는 따라가지도 않고, 조용히 악우를 보냈다.

저번처럼 분노가 치솟지는 않았다. 화가 나긴 했지만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마리사의 태도에 대한 의문 쪽이 더 컸다.


'왜 저렇게 내가 답장을 쓰는 것에 집착을 하는 걸까......?'


마리사는 확실히 뻔뻔한 소녀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타인의 행동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어머니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앨리스는 마리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마법을 쓰고, 뻔뻔하고 뒤틀린 녀석에 고집불통이며 제멋대로면서도 실은 뒤에서 상당히 분발하는 노력파라는 것. 그런 정도다.


'......의외로 잘 알고 있을지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와 보낸 시간은 나름대로 긴 편이다. 앨리스는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이젠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알게 되겠지. 몰라도 별 상관은 없지만.'


두 사람은 그런 가벼운 관계였다.








정오 조금 전에는 인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고 있으면 경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와 길을 따라 걸어서 마을로 향했다.

요 괴가 날뛰는 환상향이라곤 해도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인간이 습격당한다거나 잡아먹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을은 고작해야 짐승을 막는 정도인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망루 위에 있는 남자는 무료한 듯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뜻밖에 이쪽을 알아챘다는 듯이 몸을 쭉 펴고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인형사 누님이잖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오늘은 축제에 관련해서 상의하러 온 거냐?"

"네. 지나가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지나가도록 해. 아가씨의 인형극은 귀엽다고 해서 내 딸도 기대하고 있거든. 얼마 전에 '나도 저런 인형 갖고 싶어요' 라고 해서 손재주 없는 엄마를 곤란하게 했다니깐."

"어머."


키득 웃은 뒤, 앨리스는 보초를 서는 남자와 가볍게 인사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나도 변한 걸까.'


환상향으로 막 왔을 때는 패기와 경계심 때문에 완고한 태도를 고집했지만, 마을의 인간과 교류를 하게 된 뒤로부터는 그런 긴장감도 아예 없어져 버렸다.

마 계라고 해도 창조신부터가 그 모양이고, 무서운 이름 치고는 평화로운 세계였다. 하지만 이 환상향은 그 이상으로 여유로웠다. 사람 같은 건 손가락 하나로도 비틀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요괴가 잔뜩 있는데도 어디를 보나 평화로웠다.


'생각하면 할 수록 대단하단 말야.'


애초에 마을 안에서부터 대낮에 요괴가 걸어다녀도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 정도로 요괴라는 것이 일상풍경에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앗, 인형 언니다~앗!"


갑자기 길 한가운데서 여자애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조금 놀라며 그쪽을 보자, 작은 여자애가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라, 이 애는.....'


분명, 저번 축제 때 가장 앞자리에서 인형극을 보고 있었던 여자애다. 열심히 눈을 반짝이며 인형극을 본 데다가 공연을 끝낸 앨리스가 정리를 시작했음에도 그 자리를 지켜서 강한 인상이 남았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저기, 언니, 오늘도 인형들이랑 같이 온거야?"


이쪽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저번과 같은 반짝임이 담겨 있었다. 앨리스는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상하이와 호라이를 여자애의 눈 앞에까지 내려서 가벼운 인사를 시켰다.


"샹하~이"

"호라~이"


덤으로 말하게까지 한 건 앨리스 나름대로의 서비스였다. 여자애는 드디어 흥분해서 환호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저기, 언니. 연극 보여줘, 연극!"

"응? 그건....."

"얘도 참, 축제까지 기다리라니깐."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애의 어께에 손을 올린 건, 어머니로 짐작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친밀감 있는 모습을 한 아주머니였다.


"언니도 바쁘잖니."

"에엣, 그런."

"때 쓰지 마렴. 죄송합니다, 저희 집 애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아주머니와 유감스러워하는 여자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앨리스는 웃었다.


"괜찮아요, 그 정도로 서두르는 일도 아닌걸요."

"정말!? 만세~!"

"괜찮으신가요? 죄송하게 됐네요."

"준비해 온 게 없어서 대단한 건 보여줄 수 없지만요."


손을 들며 기뻐하는 여자애와, 그 뒤에서 곤란한 듯이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 앨리스는 미소지으며 즉흥적인 인형극을 시작했다.


"자아, 즐거운 인형극, 시작해요."


변 함없는 대사를 말하며, 앨리스는 인형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인형이 두 개 밖에 없는 연극이라 그다지 재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자애는 저번 축제 때 처럼 눈을 반짝이며 연극을 보고 있었다. 각본도 없고 이야기도 단순하기 짝이 없었지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속 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인형극의 전개에 맞춰 눈 앞의 여자애의 표정이 계속해서 바뀌는 걸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고조되어 갔다. 상하이와 호라이는 둘이서 하늘을 날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여자애의 눈 앞에서 두 인형을 조종해 졸렬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다가, 앨리스는 문득 그리운 감상에 잠겼다.


'......나랑 어머니도,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기억해내 보았다.


───신키님은 말했습니다. "자, 앨리스쨩, 지금이야말로 해치우는거야! 초필살, 마계최강러브러브부모자식어택!" 마왕 유메코와 그 부하 둘은 차원의 저편까지 날아갔습니다.

───잠깐, 이건 너무 어이없잖아요 신키님!

───이게 무슨 이야깁니까 바보털 신!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마음대로에요!

───후하하하하핫, 사랑의 힘에 불가능은 없는 것이다앗!


힘이 빠질 뻔 했다. 지금의 자신보다 더 심한 내용의 인형극이었다.

하지만, 인형극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혼자 흥에 겨운 신키에게 질려 하면서도 즐거워 보였고, 어린 앨리스도 배를 잡고 웃었었다.

그러니 분명, 정말로 즐거웠던 거겠지, 라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상하이와 호라이는 언제까지나 즐겁게 살아갔답니다. 이야기 끝."


상냥한 기분으로 미소를 지으며, 앨리스는 인형극의 막을 내렸다. 몇 안되는 관객인 여자애가 인사를 하는 두 인형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대단해, 멋져~!"

"얘는, 제대로 언니에게 감사하도록 하렴."

"응! 고마워, 언니!"

"네, 별 말씀을."


앨리스는 생긋 웃고 인형을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 사이에 여자애는 길을 지나가는 친구를 붙잡고, 아까의 인형극이 얼마나 멋졌는지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쓴웃음을 짓는 앨리스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아주머니는 여자애를 온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바쁘셨을탠데."

"아니요, 정말로 서두르고 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러셨나요? 아니, 저 애는 당신의 인형극이 정말 좋은가봐요. 저에게까지 '인형 만들어 줘' 라며 때를 쓰는걸요. 하지만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인형 같은 건 만들어 본 적도 없어서 말이죠."


볼에 손을 대며 곤란한 듯이 미소짓는 아주머니께, 앨리스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 애를 위해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네엣? 그런, 미안하게스리."

"괜찮아요.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저 애도 열심히 인형극을 봐 주니까, 서비스에요. 하지만"


앨리스는 장난을 치고픈 마음이 들어,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축제에서의 인형극이 끝난 뒤에 건네줄 생각이니, 그때까지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놀래켜 주고 싶거든요."


인형극에서 썼던 인형을 그대로 여자애 쪽으로 날아가게 해서 줄 생각이었다. 얼마나 기뻐해 줄지 상상하자 자연스래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죄송하지만, 말씀대로 부탁드리도록 할게요. 언젠가 한번 답례를 하겠습니다."

"아니요, 신경쓰지 마세요. 저도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까요."

"저기, 둘이서 무슨 얘기 하는거야?"


깨닫고 보니, 여자애가 돌아와서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런 여자애의 앞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걸었다.


"얘, 좋은 걸 알려줄까."

"뭔데?"

"네가 축제까지 착한 아이로 있으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거야."

"정말? 좋은 일이 뭔데?"

"그건 비밀이야. 하지만 엄청 기쁜 일이란다. 그러니까 축제까지 착한 아이로 있으렴. 언니랑 약속이다?"

"응, 약속!"

 

앨리스는 여자애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럼, 이걸로 인형을 만들어 줄 수 밖에 없게 됐네, 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언니, 바이바이~! 축제, 기대하고 있을태니까~!"

 

크게 손을 흔들며, 여자애는 어머니와 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뭐랄까'

 

앨리스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나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마법사는 나 정도 밖에 없지 않을까.'

 

아는 사람 중 한 명인, 홍마관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자기보다 더한 실내파인 그녀가 자기처럼 어린애들이 좋아해주는 모습 같은 건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뭐, 원래 평범한 마법사라면 그런 거겠지만.'

 

자신은 특이한 거겠지,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연구분야가 인형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렇게나 인간들에게 호의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 슬슬 가봐야겠네."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때, 앨리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까의 모녀와 엇갈려 지나가는 사람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만하게 묶은 벌꿀색의 머리. 연약해 보이는 체격과 양손에 든 가방. 틀림없이 그 부인이었따.

 

'어째서.'

 

앨리스는 당황하며 가까이에 있는 집과 집 사이에 숨었다. 다행히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옆을 지나갔음에도 이쪽을 알아채지 못했다.

 

"후~, 위험하다 위험해."

"이런 곳에서 뭘 하는거야."

"우햐악!?"

 

마리사와 비교하면 조금 귀엽지 못한 비명소리가 울리고, 앨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묘하게 생긴 모자를 쓴, 머리가 긴 미인이 서 있었다.

사람 마을의 수호자로 이름이 높은 카미시라사와 케이네. 일단 앨리스와도 면식이 있었다.

케이네는 눈을 찌푸리며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한가, 마법의 숲의 인형사."

"아, 안녕. 아, 깜짝 놀랐네. 놀래키지 말아줘, 좀."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그렇게 수상한 모습으로 있으면 말을 걸고싶어지는 법이지. 그래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에, 그게. 맞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이보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게나. 정말이지...... 그래서, 누구 말이지?"

"저쪽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

"어디........ 응?"

 

앨리스가 가리키는 곳을 본 케이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저 사람은...... 저 사람을 모르는 건가?"

"응?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이야?" 

"유명하고 자시고..... 저 분은 키리사메 댁의 마님이 아닌가."

"키리사메? 키리사메라면....... 뭐어어어엇!?"

 

무심코 크게 소리쳐버리고 당황해서 입을 닫았다.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인...... 아니, 키리사메 부인에겐 들리지 않았던 듯 했다.

 

"그, 그럼 뭐야. 마리사의 어머님이란 소리야?"

"그렇게 되지.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몰랐던 듯 하군."

"그, 그거야....... 그건 그렇고, 마리사의 집이 인간 마을에 있었구나."

"그것조차 몰랐던 건가, 자네."

"응. 그것보다 마리사가 애초에 환상향의 주민이었다는 것 자체를 지금 처음 알았어."

"너 말이다, 숲에만 틀어박히니까 그렇지......... 뭐, 됐나."

 

한숨을 쉰 뒤 케이네는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마리사의 본가가 이 마을에 있는 큰 살림 도구가게 '키리사메점'이라는 것과, 그녀가 지금 본가와 절연한 상태에 있다는 것 등.

 

"전혀 모르고 있었어."

"마을에선 유명한 이야기다. 너만 해도 여기에 온 적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

"축제 같은 때 밖에 오지 않기도 하고 딱히 흥미도 없었거든."

".......음, 그쪽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 말 하지 않겠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해도 되겠는가?"

"음, 뭐어, 상관없긴 한데, 왜?"

 

갑자기 케이네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원래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자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앨리스. 너는 저 사람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저 사람과 네가 알게 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일 터다."

"그, 그건 좀 심한 말 같은데? 그거야 난 숲에서 거의 나오지 않긴 하지만."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세. 아무래도 좋으니 대답해 주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케이네의 표정이 진지했으므로 앨리스는 솔직히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케이네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고 앨리스가 조금 불안해졌을 때, 케이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앨리스. 오늘은 축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온 거지?"

"응, 맞아."

"그 후로 우리 집에 오지 않겠나? 위치는 알려주도록 하지."

"괜찮은데, 왜 그래?"
"할 이야기가 있다. 마리사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와 주는 거겠지?"

 

물어보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말로는 예 아니요를 말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정말이다."

 

케이네는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카 미시라사와 케이네의 집은 인간 마을의 안에 있었다. 평소엔 이곳을 서당으로 써서 어린애들에게 공부를 시키거나 역사를 편찬하는 데에 힘쓰기 위해 쓰이고 있었다. 반수(반 짐승)라는 종족이면서 이렇게까지 인간 마을에 받아들여지는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성실한 인격 덕분이었다.

 

"잘 와주었네. 미안하군. 급한 이야기라서 말이다."

"아니야. 나도 그 사람이 신경쓰여서 온 거니까. 여러가지로 알려줄 수 있는 거지?"

"그럴 생각이다. 들어와 주게."

 

사람 마을에서의 높은 지위와는 반대로 케이네의 집은 아담했다. 앨리스가 지나온 곳은 그녀의 집에 비하면 상당히 좁은 현관이었다.

 

"미안하지만 좁은 건 참아 주게."

"딱히, 상관없어."

 

케이네는 화로 앞에 앉아 앨리스에게 녹차를 끓여준 후 잠시 고심하는 듯 침묵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키리사메 마리사가 키리사메점의 외동딸이라는 건 낮에 이야기 했었지?"

"응, 절연상태였던가?"

"그래. 의절당했다는 거겠지. 몇 년 전에 마을을 나간 뒤로 그 애를 본 건 영야이변이 처음이었다. 너와 얼굴을 마주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던가."

"그렇지....... 근데, 잠깐만. 그럼 너희들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거야?"

"아니,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네. 그 애는 상인의 딸 답게 집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었다. 그러니 서당에는 오지 않았었고 겨우 몇 년 만에 너무나도 변했으니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네."

"아아, 그건 왠지 알 것 같아."

 

앨리스도 마계에서 싸웠던 때와 환상향에서 재회했을 때의 마리사가 너무나도 달라서 처음에는 같은 사람인 줄 생각치도 못했었을 정도였다.

 

"대체 뭘까. 그 녀석, 이미지를 바꾸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걸까."

"글쌔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겠나. 문제는 어째서 그 아이가 본가로부터 의절당했는가, 이다."

"어째서야?"

"그래. 일단은 이것부터 이야기하도록 할까. 키리사메점은 십 몇년 전부터 마법에 관한 품목은 하나도 취급하지 않지."

"십 몇년 전...... 즉, 마리사가 태어났을 때 부터?"

" 아니. 그 가게는 주인이 마님과 결혼했을 때 부터 있었다. 더욱이 재력도 상당해서 주변의 마법에 관한 품목을 파는 가게를 상당수 인수했었지. 덧붙여 말하면 그 가게는 지금도 마법사, 혹은 마법 아이템을 갖고 있는 사람은 출입금지다. 너도 가면 쫓겨나겠지."

"그, 그렇게나 철저하게 하는거야!? 대체 마리사네 아버님은 얼마나 마법을 싫어하는 거야?" 

 

앨리스는 질렸지만 동시에 납득도 했다.

 

"과연. 즉, 마법을 싫어하는 아버지와 마법사를 지향한 마리사가 크게 싸워서 그 결과, 의절당했다는 거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설령 부모에게 반대당하더라도, 그 마리사가 자신이 희망하는 길을 꺾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앨리스는 손에 턱을 괴고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았다.

 

"...... 어머니는 그렇게 마법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거역할 수 없었어. 그래서 집을 나간 딸이 걱정돼서 남편 몰래 마법의 숲이 어떤 곳인지 보러 갔다던가? 우리 집에 온 것도 어쩌면 딸이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으려나."

 

텐구의 신문이나 이변해결의 소문 같은, 딸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근의 기묘한 사태가 전부 이해되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마리사가 신키가 직접 만든 쿠키 때문에 그렇게나 감정적이 되는 것도 왠지 이해가 간다.

 

'뭐야, 결국 자기가 어머니를 잘 만날 수 없으니까 질투한 거잖아. 의외로 귀여운 부분도 있었네, 그 애도.'

 

앨리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이 이야기로 앞으로 한 달은 놀려먹어 주마 하고 생각했다. 요 보름간 꼬였던 문제가 해결돼서 기분도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화로 반대편에 앉아있는 케이네의 표정을 보았을 때, 고양된 기분은 사라졌다.

 

"...... 케이네?" 

"응, 아, 미안, 미안하군......"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면서도 케이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뭔가를 깊이 후회하고 있는 듯 한, 슬퍼하고 있는 듯 한, 괴로워하는 듯 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죄어오는 듯 한 아픔을, 그런 걸 느끼는 표정이었다.

 

"앨리스. 네 추측 말이다만. 잘 추측했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케이네는 울적한 한숨을 쉬고서 고개를 저었다.

 

"거의 틀렸다. 그런 마음편한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생각한다네."

"...... 어떻게 된 건데? 이야기를 들어봐선 이런 패턴 이외에는 말이 안될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게까지 단순하지 않다는 거다."

 

케이네는 조용히 말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귀가 아파질 정도의 침묵에, 앨리스는 몸을 조금 움직였다. 깨닫고 보니 목이 컬컬하게 말랐지만, 차를 마시는 것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앨리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어나가선 안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인,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 키리사메 마리사 본인에게만큼은 절대로 이야기해선 안돼. 약속을 해 줄 수 있겠는가."

"....... 약속하는 건 괜찮지만. 뭐야, 그렇게나 중요한 이야기야?"

"그래.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키리사메 부부와 나.......... 그리고 아마도 야쿠모 유카리 정도겠지."

"유카리도........?"

 

환상향의 관리자면서 요괴 중의 현자인 대요괴의 이름을 듣고, 앨리스는 몸을 들썩였다.

그 요괴가 관련돼 있고, 더욱이 지금까지 비밀로 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면 정말로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

"뭔가?"

"왜, 그렇게나 중요한 일을 나에게 말해주는 거야?"

"그렇군. 잘 설명해줄 순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자네가 상냥한 사람이라서, 일까."

 

키리사메 부인의 덧없는 미소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아마도,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틈새요괴가 멈추러 오지 않는 걸 보니, 그녀도 그렇게 판단한 거겠지. 다만"

 

케이네는 입을 꽉 닫고, 괴로운 듯이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걸 들으면 자네는 아마도 상처를 입겠지. 어쩌면 앞으로 마리사와 이야기할 때마다, 그 상처가 깊어질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은가?"

 

괜찮은가, 라고 들었을 때, 즉답을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면 더욱이.

하지만, 그래도 앨리스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상관없어. 이대로 듣지 않고 돌아가다니, 말도 안돼."

"그런가.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케이네는 각오를 굳힌 듯 자세를 바로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키리사메 마리사와 그 주변 사람들에 관련해서 아는 걸, 모두 말하겠네. 일이 벌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전이다......"

 

 

 

 

 

 

 

날이 저물고, 밤의 어둠이 다가오는 마법의 숲 속을, 앨리스는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늘을 날아서 지나갈 길이었지만, 오늘은 도저히 날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케이네에게서 들은 사실은 무겁고 괴로운 것이었다.

 

'.......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그 사람은...... 마리사의 어머니는, 나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걸까. 어째서, 나를 만나러 오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알 수 없었다. 전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지만, 케이네에게서 여러가지를 들은 지금도 이전과 같이 일의 전말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앨리스는 대체 어디서부터 들어야 할지 몰랐다.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 뿐이었다.

그 때 문득, 앨리스는 길 저편에 누군가가 있는 걸 알아챘다. 어둠 속에 녹아들어갈 것만 같은 흑백의 인영.

 

'....... 마리사?'

 

커다란 나무 앞에 서서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틀림없는 마리사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낮에처럼 뭔가 다른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듯이 앨리스가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알아채는 기색은 없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 어두워서 잘 구분이 가지 않는, 억누른 목소리가 들렸다.

 

"...... 뭐야..... 이제 와서......!"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앨리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만난 거야!? 만나버린 거야!?'

 

어리석었다. 낮에 보았을 때, 키리사메 부인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행선지가 앨리스의 집이라는 것 쯤은, 조금만 생각했어도 알 수 있었을 탠데. 너무나도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버린 나머지 사고가 마비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사!"

 

참지 못하고, 앨리스는 마리사에게 달려갔다. 놀란 듯이 돌아보는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었다.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뭐, 뭐야, 앨리스."

 

마리사는 눈가를 가리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는,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망설였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나버렸다면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세세한 것 까지 마리사가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너무 많아.......!'

 

앨리스는 갑갑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뭘 하는거야?"

"아무것도."

"그래. 저기, 마리사. 오늘, 누군가가 여길 지나가지 않았어?"

 

마리사의 몸이 움찔 하고 흔들렸다. 그걸 보고, 맬리스는 확신을 굳혔다. 역시, 그녀는 어머니와 만났다...... 만약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다고 해도, 어머니를 봐 버린 건 확실하다.

 

"모, 모르겠는데."

 

하지만, 마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떨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명백했다.

앨리스는 이야기해도 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재빨리 계산하면서 질문을 계속했다.

 

"저기, 마리사. 솔직하게 대답해 주지 않을래?"

"난 언제다 솔직하다구. 것보다 왜 그렇게까시 신경쓰는거야."

"그건...... 실은 요즘, 우리집에 다니는 손님이 있어서 말야."

"뭐라구!? 말도 안돼........ 아, 아니."

 

마리사는 도중에 놀람을 감추고, 무리하게 눈을 돌렸다.

 

"흐, 흐응, 그런 건가. 어떤 사람이야?"

"나도 자세히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긴 한데 사람 마을의 주민이라고 들었다. 요즘 자주 오시거든. 여성이야. 그러고 보니 마침 너랑 머리 색도 같네."

 

방금 막 깨달았다는 듯이 말하자 마리사는 부끄러운 듯이 모자를 내리썼다.

 

"뭘 하러 오는 거야, 그 사람은?"

"모르겠어."
"모른다니, 너."

"내가 길을 잃은 사람을 내쫓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 사람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 뿐이야."

"...... 그러냐."

 

마리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과 그 사람의 관계를 앨리스가 몰라서 한시름 놓았다는, 어쩌면 그 사람이 왜 마법의 숲에 왔었는지를 몰라서 유감스럽다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 반응....... 역시, 그 사람을 만난거야?"

 

추궁하듯 물어보자 마리사는 놀란 모습으로 고개를 젓다가, 멈추었다.

 

"...... 그래. 만났다고 할까, 멀리서 본 것 뿐이지만 말야."

"어디로 갔는지 알겠어?"

"몰라. 하지만 적어도 앨리스네 집 방향은 아니었어. 어찌 됐든, 내 얼굴만 보고도 도망쳐 버렸으니까."

"뭣."

 

앨리스는 경악했다. 즉, 길을 벗어나 버렸다는 건가.

 

"위험한 거 아냐, 그거!"

"뭐가 말야. 괜찮겠지. 요즘은 사람이 잡아먹힐 일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하다는 건 아니잖아!?"

 

환상향은 평화로운 세계다.

하쿠레이 대결계에 의한 제약으로 요괴가 사람을 습격하지 못하게 하게 된 이래, 요괴에게 사람이 잡아먹혔다는 이야기 같은 건 전승된 이야기 속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요괴가 놀리거나 지나치게 간섭하는, 그런 심한 일도 있고, 요정에 의해 길을 잃어버려 위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애초에 이 마법의 숲 자체가 환각작용이 있는 버섯들의 포자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있어서 힘이 없는 자들에겐 상당히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마리사가 키리사메 부인과 조우한 것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안쪽까지 해매어 들어갔다면 상당히 위험한 사태였다.

앨리스는 당황하며 마리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리 와. 같이 그 사람을 찾자."

"왜 그래, 잡지 마."

 

마리사는 거칠게 앨리스의 손을 떨쳐냈다.

 

"괜찮다니깐. 어차피 지금쯤 사람 마을로 돌아갔겠지."

"그런 건 모르는 일이잖아!?"

"시끄럽구만.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하는거야."

"너야말로, 뭘 그렇게 가만히 있는거야!?"

 

─── 그 사람은, 네 어머니잖아!?

 

앨리스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말해도 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 잘은 모르겠지만."

 

입을 닫은 앨리스를 보고, 마리사는 천천히 숲 저편을 가리켰다.

 

"그 사람이라면, 저쪽 방향으로 갔어. 우리랑은 다르게 걸어서만 가니까, 발자국 정도는 남지 않을까."

"넌 같이 찾아주지 않는거지."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했잖아. 난 너랑 달라서 한가하지 않다구."

 

고개를 돌린 마리사를 몇 초쯤 바라봤을까, 앨리스는 혼자 마리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 바보! 마리사, 이 고집쟁이!'

 

앨리스는 마음 속으로 친구를 욕하며 마법으로 빛을 밝혀 발 밑을 비추었다.

다행히, 마법의 숲의 질척이는 지면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한 개,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라면 찾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묘한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약의 일이 벌어진다면, 뒤끝이 너무 좋지 않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돼, 라고 앨리스는 결의를 다졌다.

발자국은 숲 깊숙히까지 이어져 있었다. 눈에 띄었기에 발자국을 잃어버릴 일은 없었지만 깊숙히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안은 커져만 갔다.

 

'이 부근까지 오면 버섯의 포자량도 늘어난단 말야.'

 

그것이 숲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얼마나 부담을 줄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상상이 나쁜 방향으로만 돼서 앨리스는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설마.......!'

 

앨 리스는 더욱 빠르게 달렸다. 과연, 조금 앞의 트인 곳에, 키리사메 부인이 쓰러져 있었다. 언제나 그녀가 갖고 있던 가방도, 가까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설마, 하고 파랗게 질린 한 순간. 쓰러져 있는 그녀로부터, 약하디 약하지만 확실한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것 뿐인 듯 했다.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였다. 잘 보니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을 수많은 요수(요괴 짐승)들이 으르렁 대며 모여들고 있었다. 스펠 카드를 행사할 줄도 모르는, 지능이 낮은 녀석들이었다.

 

'위험한데, 상당히 흥분돼 있는 것 같아....... 어서 벗어나지 않으면.'

 

초조해 하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을 때, 갑자기 숲의 어둠을 뚫고 눈부신 섬광이 달렸다.

나무를 화려하게 날려버리면서 앨리스의 옆을 지나간 빛은, 짐승들의 일부를 소멸시키거나 날려버리며 저녁의 어두운 하늘로 사라졌다. 간신히 살아남은 다른 짐승들도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마스터 스파크.'

 

친구의 특기인 필살 마법이다. 앨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저녁 어스름의 하늘을 도망치듯이 날아가는 흑백의 모습이 보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 삐뚤어진 녀석.'

 

조금 슬픈 기분드로 웃으며, 앨리스는 키리사메 부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부인의 몸에 외상의 흔적은 없었다.

문득 깨닫고서 가까이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무심코 안을 들여다 보고서 눈을 휘둥그래 떴다.

 

 

 

 

 

잠시 망설였지만 앨리스는 부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1층의 방 하나를 정리하고 가능한 한 마법에 관련된 물건을 치운 후, 침대에 눕혔다.

그대로 사람 마을로 데려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거기서는 좀 멀기도 했고, 기절한 상태로 옮겨졌다간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앨리스는 부인과 너무 오래 맞닿아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 앨리스는 혼자 부인이 잠든 방의 옆방에서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차를 준비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조용히 문이 열리며 부인이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다.

 

"눈을 뜨셨군요. 다행이다."

 

다가가려다가, 앨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걸 본 부인이 슬픈 듯이 눈을 감았다.

 

"죄송하군요."

"아니요...... 이쪽이야말로. 이 정도 거리가 있으면 괜찮으신가요?"

"네에, 정말로, 죄송합니다."

 

부인은 사과하면서 앨리스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둘이서 마주보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앨리스는 만일을 위해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 방 역시 마법에 관련된 물건은 정리돼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거의 완전히 혼자이며, 인형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지는 않았어도 됐는걸요."

"아니요. 기분은 괜찮으신가요."

"괜찮답니다. 놀라서 숲의 안쪽까지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한동안 어둠 속에서 달리다가,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렇게 말하고, 키리사메 부인은 작개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구해주신 거로군요."

 

말하는 것과는 달리, 부인의 눈동자에는 부정해주길 기대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앨리스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까지 옮겨온 건 저입니다만, 구해준 건 마리사입니다. 요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당신을 보고....... 자기가 '위험하지 않아' 라고 단언했으면서, 제 뒤를 쫓아와서 당신이 요수에게 둘러싸인 걸 본 즉시 마법을 써서."

"그런, 가요. 그 아이가."

 

키리사메 부인은 고개를 숙인 뒤 살짝 눈가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짧은 말을 주고받고 키리사메 부인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저에 대한 걸 누군가에게서 들은 모양이군요."

"네, 케이네...... 카미시라사와 케이네 씨에게."

"그래, 케이네 님에게....... 그 분도, 당신을 신뢰하고 있는 거로군요."

"당신 일로 상당히 후회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로 책임감이 있는 분이시지요. 사실은 그 분이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하나도 없는데도."

 

키리사메 부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질문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앨리스는, 조금 전에 케이네에게 들은 내용을 되새겼다.

 

 

 

 

 

 

"일이 벌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전이다."

 

케이네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람 마을의 일가가 행방불명이 됐다."

"행방불명?"

" 그래. 마을 내에서도 특히 가난한 집이었지. 그걸 부끄러워한 탓에 주변과의 교류가 소흘한 점이 있어서 사라진 걸 알 때까지 시간이 걸려 버렸다. 필사적으로 수색했지....... 텐구들에게까지 부탁해서 환상향 전부를 수색범위로 잡았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 가족의 행방은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1주일이 지나자 누구나 포기했지. 분명, 지능이 낮은 요괴 같은 것들에게 잡아먹힌 게 틀림없다며 말이다."

"그치만."

"그래.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지능이 낮은 요괴라 한들, 야쿠모 유카리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터. 그래서 나는 다른 녀석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역시, 가족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상한 이야기네,앨리스는 생각했다.

환상향의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상, 마을 사람들은 야쿠모 유카리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모든 것의 경계를 조종하는 정도의 능력으로 갖가지 장소에 나타날 수 있는 그녀에게 찾지 못할 사람이 없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다.

앨리스의 표정으로부터 생각을 읽었는지, 케이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야쿠모 유카리라면 뭔가 알지도 모른다고, 나 역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말이지, 그녀조차도 그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 말도 안돼,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도 그 때는 그랬다. 어쩌면 이 여자가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 한 가족을 숨긴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야쿠모 유카리가 제일 먼저 혼란에 빠져 초조해 했으니 말이다."

"그 유카리가?"

"그래. 믿지 못할 일이지. 야쿠모의 그 표정을 본 건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본 적이 없었다네. 거의 전능하다고까지 일컬어지는 그녀였음에도, 자신에게도 파악할 수 없는 사태라는 건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지."

 

케이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수색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가족의 행방을 알게 된 건, 그들이 사라지고 난 지 3 달이나 지났을 때였지."

 

거꾸로 말하면 그렇게나 긴 시간동안 유카리조차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사태의 이상함을 앨리스는 새삼스래 인식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는데?"

"....... 마법의 숲이다. 정확히는, 그 안쪽에 있는, 어떤 마법사의 집 안이었다."

"뭐.........? 그, 그럼."

"그래. 범인은, 마법사였다."

 

경악하는 앨리스에게, 케이네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 나중에 발견된 그 마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녀석의 연구에는 환상향의 인간이 무조건 필요했었다는 것 같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의 피와 살과 혼에 무언가 특수한 요소가 담겨 있다던가 하더군. 뭐, 야쿠모는 코웃음쳤지만. 하지만 그 남자는 어두운 숲 속에서 혼자 연구를 계속해서 그 결론에 도달해, 결국엔 야쿠모 유카리마저 넘어서 버렸다."

"어, 어떻게!?"

" 모른다. 하지만, 녀석이 무서울 정도의 집념으로 그걸 완성해낸 건 틀림없다. 녀석은 나 같은 건 도저히 이해도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야쿠모의 '경계를 조종하는 정도의 능력'은 물론이고, 환상향의 각종 강자들의 눈으로부터도 도망쳐버렸었던 거다. 야쿠모조차 경악했었지, '설마, 이런 방법이 있었을 줄은' 이라며."

 

앨리스는 한기를 느꼈다. 야쿠모 유카리의 능력조차 능가해 보인 그 마법사의 집착의 원인. 그 정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건 즉, 자기도 그 영역에 발을 디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 왜 그러나. 안색이 좋지 않군."

 

케이네가 걱정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나도 이상한 이야기라서."

"이상하다, 인가. 그렇군. 실제로 이 일에 엮였던 나조차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게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앨리스는 침을 삼키고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 발견했다. 그 마법사의 집의 지하실에서 말이다."

 

케이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노와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 강한 후회가 담긴 표정이었다.

 

"비참했다. 아니,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 지하실에 있었던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정도다."

 "대체 무슨.........?"

" 그걸 설명하지 못하는 걸 부디 용서해 주게. 말해야만 하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할 것만 같다네. 게다가, 녀석의 미친 연구의 내용 따위, 이야기의 목적과는 크게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법사는 야쿠모의 분노에 의해 존재의 파편조차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가족은 발견됐다."

"발견됐다, 이 말이지."

" 그래. 그 지경이 돼서까지 간신히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느 정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그 야쿠모마저도 애써야만 했었겠지. 살아는 있었다만, 도저히 구출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가."

"아니, 괜찮아. 그럼 유카리조차도 그 사람들을 원래대로는......."

"그래.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앨리스는 주저하면서도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이, 마리사의 어머니인거지."

"그래. 서두가 길어서 미안하군."

"괜찮아. 마리사가 의절당한 진짜 이유란 건, 방금 이야기를 몰랐다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거지?"

"그렇지."

"계속해줘."

"알겠다. 그래서, 구출받은 그 소녀는,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 이유도 있다. 마법사에 대한 반감이 높아진 사람들의 마음이 넘치는 건, 환상향에 있어 좋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그녀 자신이 그걸 바랬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럼, 기억을 봉인한거야?"

 

유카리의 힘이나 역사를 먹는 힘을 가진 케이네라면 그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게 보였다. 하지만 케이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녀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기억을 지닌 그대로, 앞으로도 환상향의 한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희망했다."

"그건..... 뭐랄까, 강한 사람이네."

"그래. 의외로 마리사의 그 뻔뻔함은 유전일지도 모르겠군. 뭐, 솔직히 제대로 전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앨리스는 작게 웃었다. 케이네가 방금 한 말이, 삐뚤어진 마리사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였다.

케이네도 그에 응하듯,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 그녀는, 평온한 환상향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전부 짊어지며 살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사라진 기간 동안의 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긴 곤란했으니 겉으로는 이 3개월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라고 했지만 말이네.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야쿠모가 관계된 일이라고 슬쩍 알려줬더니 다들 얌전히 입을 다물더군."

"그랬겠지."

" 마을로 돌아온 그녀는 원래 살던 집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괴로운 기억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이것저것 신경을 썼고, 야쿠모도 최선을 다해 보살펴 줬던 듯 했지만, 근본적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진정한 의미로 구해준 건 키리사메 한 사람뿐이었던 거겠지."

"키리사메라면....... 마리사네 아버지?"

" 맞아. 그때 막 대를 이었던, 큰 살림 도구가게, 키리사메점의 주인이지. 옛날부터 호탕하고 시원하다고 할까, 분위기를 파악 못한다고 할까, 어쨌든 자신의 정열에 모든 걸 맡기고 달리는 남자였지. 주변사람들이 기분 나쁘다며 키리사메 부인을 피해 다닐 때, 녀석만은 신경쓰지 않고 매일같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마리사의 강하게 밀어붙인달까, 의지가 강한 건 틀림없이 유전이겠지."

 "그래도 역시 제대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네를 보며, 앨리스는 다시 작게 웃었다.

 

"녀석이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 건 누가 봐도 명백했지. 여하튼, 만나고 나서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결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정도니까."

"너무 빠르잖아!?"

 "음. 마리사의 행동력은 틀림없이 유전.........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나. 뭐, 어쨌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는 녀석을 받아들였다."

"그건, 어느 정도로?"

"결혼했을 때, 녀석은 그녀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었다....... 라고 하면 알겠나?"

"응."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키리사메에게 기가 막혔던 모양이지. 그 이후로 부인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됐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로, 사람 마을로 돌아온 것이지."

"다행이네."

 

나름 행복한 일의 전말에, 앨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물론, 이야기가 이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네의 표정은 다시 지독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그렇게 1년도 지나지 않아 마리사가 태어났다. 키리사메점의 경영은 여전히 순조로웠고, 적어도 앞으로 걱정할 것은 없어 보인다고, 누구나 가슴 깊이 믿었지."

"하지만, 문제가 생긴거네."
"그래. 하지만 조짐은 있었다. 키리사메가 결혼하고부터 갑자기 그 가게는 마법에 관련된 물건을 하나도 취급하지 않게 됐지."

"그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내의 과거를 안다면, 남편 쪽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어?"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괴로운 기억을 연상시키는 물건을, 그녀의 주변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건 이상하다."

"어째서."

"그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주변에 폐를 끼치는 걸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애초에 전부 짊어지고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한 그녀에게 그런 염려를 보이는 것 자체가 그녀의 삶의 방식을 모욕한다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대체 왜?"

 

갑자기 케이네의 눈이 가늘어지며 똑바로 이쪽을 응시해 왔다.

 

"이제부터가, 너에게 괴로운 이야기다. 정신 차려서 들어주길 바란다."

 

어리둥절해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갤리스에게, 케이네는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까지 앨리스가 이야기했을 때, 키리사메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제 몸에 대한 것도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키리사메 부인은 쓸쓸한 듯 눈을 감았다.

그 녀를 덮친 무섭고도 끔찍한 사건........ 마법사의 미친 실험의 영향은, 야쿠모 유카리가 완전히 제거했을 터였다. 하지만, 거의 전능에 가까운 그녀에게도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이, 키리사메 부인의 몸에 저주처럼 남아 새겨져 있었다.

 

"..... 그 일이 발각된 건, 제가 결혼하고 키리사메점을 돕게 됐을 때였어요. 그 때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도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는 일이 있어서....... 두통이나 현기증, 구토감....... 가끔은 너무 괴로워서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어요. 대체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찾고 있었을 때, 남편이 원인을 알아챈 겁니다. 제 몸 상태가 좋지 않게 됐을 때, 반드시 주변에 마법에 관련된 물건이 있었다는 걸요."

 

앨리스는 손으로 무릎을 꼭 쥐었다.

 

"즉......."

"네. 제 몸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그건 정말로 극단적인 반응으로, 직접 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사와 접촉이 있다면 물론이고, 만일 미약해도 마법의 영향을 받은 물건이 주변에 있기만 해도 갑자기 몸 상태가 이상하게 되는 정도인 듯 했다.

그야말로 마법사가 끓여준 홍차에는 입조차 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원인은 불명이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실험 때문일지도 몰랐고, 단순히 저의 심층의식이 마법이라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일지도 몰랐죠. 야쿠모님에게 상담해 보았지만, 그 분조차 이 증상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유 카리에 의하면 마법에 대한 거부반응을 발현하는 요소는, 이미 키리사메 부인의 혼에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제거하려고 하면 혼째로 지워버릴 수 밖에 없다는, 극히 성가신 것이라고 한다. 앨리스가 케이네에게 들은 것도 대략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 어째서 마리사가 의절당하게 됐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제부터 듣게 되겠지.

 

" 결국, 저희들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망설였습니다. 이대로는 남편이나 가게에 폐를 끼치게 된다고. 본래라면 가게를 나가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말했거든요, '태어날 아기를 엄마 없이 키우게 할 생각이냐'며."

 

그 증상이 발현된 당시, 부인은 이미 마리사를 임신했다는 듯 하다.

 

"....... 저는 결국 남편이 하는 일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게에 손해를 보며, 거래가 끊기고 이주마저 강요당한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이렇게, 키리사메점은 마법에 관한 물건을 취급하지 않게 됐다. 물론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주변 사람들은 "키리사메 댁 아저씨가 갑자기 마법을 싫어하게 된 것 같다"는 정도의 인식을 굳혔다.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의 이야기였다.

 

"남편에겐 면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까지 저를 배려해 주는게, 솔직히 기쁘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새로이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 사람에게 평생을 바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로서 태어날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보이겠다고."

 

마 침내 마리사가 태어나고, 1년, 2년의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남편은 장사에 재능이 있어서 마법에 관한 물품을 전부 없애고도 키리사메점은 거액을 만지는 가게가 됐다. 자신의 체질이 매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던 부인의 걱정도 기우로 끝났고, 마리사는 다른 아이들보다 상당히 건강하게 컸다고 한다.

 

"정말로, 활발한 애여서 말이죠."

 

키리사메 부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 가게 안을 달리며 돌아다니다가 나쁜 장난만 반복하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범인이라고 들통날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사과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엔 제대로 걸려서 아버지께 엉덩이를 맞도록 계산된 장난만 하는 것 같았죠."

"그 때부터 이미 비비 꼬여 있었던 거군요....... 아, 죄송해요."

 

무심코 마음 속에 있던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앨리스는 막았다. 부인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요, 괜찮답니다. 실제로 솔직하지 않은 아이니까요. 하지만 성격은 올곧고 누구와도 친해지고...... 정말로,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답니다, 그 애는."

 

그리워하는 듯 한 부인의 표정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무언가 이상한 일이 시작된 건 그 애가 9살 정도 됐을 때였을까요. 그 애가 곁에 있을 때,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는 일이 있어서...... 대체 무슨 일인가, 의문을 갖기는 했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직감적으는 알아차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저 눈을 돌리고 있었을 뿐일지도."

 

마리사는 그 즈음에 가끔씩 가게에서 모습을 감추고 어딘가로 가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분명 좁은 가게 안이 지루해져서 비밀 기지로 놀러라도 간 거겠지,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그래도 걱정됐기에, 넌지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했지만요. 그랬더니 아무래도 하쿠레이 신사로 놀러 간 것 같다고 들어서요. 그걸 듣고 저는 안심했습니다. 그곳이라면 딱히 위험한 건 없겠지 싶어서. 오히려 그 애가 나쁜 장난을 쳐서 무녀님께 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그 쪽이 걱정이었을 정도입니다."

 

마리사는 밤이 되기 전에 잘 돌아오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도 굳이 걱정은 하지 않았다는 듯 하다. 다만, 키리사메 부인만이 가끔 악화되는 자기의 몸 상태에 막연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사가 10살이 되던 생일, 부인은 결국 눈을 돌리고 있던 진실에 직면하게 됐다.

 

"생일 축하도 끝내고, 모두 잠들어 조용할 때..... 침실에 들어온 그 애가 절 흔들어 깨웠습니다. 밤에 혼자 화장실로 가는 것도 겁내지 않던 겁이 없는 아이라 대체 뭘까 싶었죠."

 

부인은 왠지 웃음을 참으며 들뜬 듯 한 모습의 딸을 잠자코 따라갔다. 그리고 가게 뒤쪽까지 가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마리사는 얼굴을 밝히며 "엄마, 이거 봐봐!" 라며 손을 들었다고 한다.

 

"....... 망연자실했습니다. 그 애가 손바닥에서 내보인 건, 틀림없는 마법의 빛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의 마리사는 마법사로서는 신출내기도 안되는 실력을 갖고 있어서 부인의 몸 상태도 그다지 악화되지는 않았다.

부인은 그 때 약한 기침을 계속했지만, "괜찮아?" 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딸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는 듯 하다.

 

"'괜찮아. 대단하구나, 아주 아름다워.' 라고 말하자, 그 애는 정말로 기뻐해 웃으며, '미마님의 마법은 더 대단해! 나도 언젠가 그 정도로 예쁜 마법을 쓸 수 있게 돼서 엄마에게 보여줄테니까!' 라며 들떴었습니다."

 

미 마, 라는 이름에 앨리스는 들은 기억이 났다. 수년 전, 마리사와 레이무와 함께 마계를 방문...... 했다고 할까, 습격해서 엉망진창으로 휩쓸고 다니고 신키마저 쓰러뜨려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악령...... 이 아니라 재앙신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그럼 마리사는 그 때부터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거네.'

 

마리사의 마법 솜씨는 일취월장했다. 이전처럼 나쁜 장난도 치지 않게 됐고, 오로지 마법에만 몰두해 있었다는 듯 하다.

 

"그 애가 마법을 쓰게 된 건, 물론 저 이외에는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마법을 싫어하시는 듯 하니, 엄마랑 너만의 비밀로 하자꾸나' 라고 말하자, 그 애도 싫긴 하지만 납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사는 더욱더 마법에 몰두했고, 부인의 몸은 점점 악화돼 갔다. 하지만 1년 정도는 주변에 들키는 일 없이, 어떻게든 견뎠다. 일이 들통난 건 마리사의 11살 생일 직전이었다.

 

"...... 언제나처럼 새로운 마법을 보여주는 그 애와 헤어지고 나서, 저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저를 발견한 건 남편이어서 그 애에게도, 가게 사람들에게도 알려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숨기는 건 할 수 없게 됐다. 추궁하는 일도 없이 그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남편에게, 부인은 모든 걸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저희들은 밤까지 이야기한 결과, 그 애와 의절하기로 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앨리스는 곤혹스러웠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부인은 딱히 마리사가 마법을 배우는 것 자체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 하다. 오히려 딸의 성장을 기뻐하며, 응원해주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설령 마리사와 같이 있지 못하게 되더라도, 떨어져 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인연마저 잘라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질문에 답하듯,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애가 상처입어버릴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처입어...... 마리사가?"

"네."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만일 아무것도 몰랐다 한들, 그 애가 마법을 쓴 것 자체가 원인이 돼서 제가 1년 정도를 괴로워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걸 알아버린다면 그 애는 얼마나 상처입을지요. 얼마나 자신을 책망할까요. 어쩌면, 이 엄마를 위해서 마법을 배우는 걸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 올곧은 애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럼, 설마........!?"

"네...... 저희들은 '마법을 이해해주지 않는 어리석은 부모'가 돼서 그 애의 마음을 지켜주자고 생각한 겁니다."

 

연기는 빠르게 실행으로 옮겨졌다. 마리사의 아버지는 딸이 어머니께 마법을 보여주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심하게 매도한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아버지 쪽에 서서, 예전처럼 딸의 마법을 보지 않게 됐고, 오히려 반대하게 됐다.

 

" 분명,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겠죠. 그 뒤로 그 애가 얼마나 마법이 멋진지를 이야기해도, 저희는 하나도 듣지 않고 '마법사가 되는 건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그만두지 않을 거라면 집을 나가라'고 한목소리로 고집을 부렸습니다. 분명, 마음 깊이 상처입었겠죠. 하지만 그 애가 자기를 스스로 탓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변변찮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버렸다고 생각해 주는 쪽이, 훨씬."

 

......... 그러고 나서 머지않아 마리사가 먼저 부모에게 절연 선언을 하고 키리사메점을 나가버렸다. 분노에 몸을 떨면서, 울부짖으며 가게를 부수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후의 일은, 예전 가게에서 수업을 받은 일이 있는 모리치카씨라는 분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마리사를 얼마간 이해해 주고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그렇게 해서 마리사는 지금까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고, 한 명의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환상향의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키리사메 부인은 결국, 딸의 마음을 지켜준 것이다.

 

"...... 당신이 저에게 온 건 마리사가 걱정돼서, 인 거였군요?"

 

물어보자 키리사메 부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전의 딸은 하쿠레이의 무녀님 이외에는 별로 교우관계가 없었지만, 최근 마법의 숲에 살기 시작하고부터 앨리스 마가트로이드라는 마법사와 나름대로 교류가 있는 듯 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에겐 실례를 범해버렸지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기분은 아니까요."

 

부인의 과거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마법사가 딸에게 어떤 해라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몸 상태가 악화되는 것도 감수하고 앨리스 마가트로이드의 인격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 만일 나쁜 사람이었을 때는"

 

앨리스는 방 구석에 놓아둔 부인의 가방을 가리켰다.

 

"저걸로, 저를 죽일 생각이셨던 거군요?"

"네."

 

부인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방 안에는 한 자루의 식칼이 들어 있었다. 부엌에서 오래 쓴 듯, 여기저기 이가 빠져 허술한 것이었다. 수도구점의 부인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가져올 수 있는 무기는, 그런 것 밖에 없었음에 틀림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걸로 마법사를 죽이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부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이다.

 

'알면서도 오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

 

어지러이 소란을 피우거나 흥분해서 고함치지 않으며 온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오늘까지 그녀와 마리사가 만나지 않은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부인은 가슴 가득히 딸만을 생각하며, 그러면서도 극한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냉정하게 행동한 것이다.

 

'강한 사람이야.'

 

그랬기에, 앨리스의 마음은 아팠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였나요?"

"매우 상냥한 분입니다."

 

몇일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말을, 부인은 다시 입에 담았다.

하지만 앨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오해에요. 저도 당신을 괴롭게 했던 마법사와 그렇게 크게 다를 바 없어요."

 

낮에 만난 여자애나 자신을 신뢰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 준 케이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들 뿐 아니라 마리사와 레이무, 그 이외에 환상향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얼굴도.

 

" 마법사라는 건 자신의 호기심이나 탐구심을 연료로 마음을 태우고, 혼을 폭주시켜서 갖가지 방해물을 넘어서 버리는 존재에요. 윤리도 , 망설임도, 죄악감도, 두려움도, 무엇이든 눈앞의 목적 이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저희들은, 그런 종족인 거에요."

 

부 인의 인생을 망쳐버린 마법사가 좋은 예시다. 그는 야쿠모 유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긴 연구의 끝에 그 대요괴조차 넘어서는 법을 알아내 버렸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요괴조차 하지 않을 잔인한 실험에 쓰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앨리스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만약, 인형의 연구에 사람의 혈육이 무조건 필요하다면?

만약, 키리사메 마리사의 혼이 있으면 완전히 자율적인 인형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들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과연 자신은 욕망을 견딜 수 있을까.

지금의 앨리스는 자신있게 단언할 수 없었다.

 

"...... 제가 마리사와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진 건 단순히 우연에 불과합니다. 결코 제가 상냥하다거나 해서가 아니에요. 어쩌면 앞으로 따님과 대적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당신의 딸을 죽게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요,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인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 말의 조용한 강함에 앨리스는 잠시 압도됐다.

 

"......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실 수 있으신가요?"

"당신이 너무나도 상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앨리스는 반론하려다 그만뒀다. 이쪽을 정시하고 있는 부인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도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으라는, 문답무용으로 알게 해주는 강함이었다.

 

'......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구나.'

 

앨리스는 어께에 힘을 빼고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 두겠습니다."

"네, 어떤 때라도 잊지 말고 마음 속에 새겨주세요. 그러면 분명, 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체 무엇에 지지 않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래도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둘의 대화는 끝나고, 그저 침묵만이 흘렀다.

오늘 알게 된, 아니, 알아버린 여러가지 사실이 앨리스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 이 사람은, 지금도 마리사를 사랑하고 있어. 마리사도 분명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머니와 화해했겠지. 하지만 그걸 전할 순 없어. 전해버리면 숨겨온 진실이 드러나서 마리사의 마음을 상처입힐테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그걸 알게 된들 그 애는 더이상 돌아오지 못할 만큼 나아가 버렸어. 이젠 어쩔 수 없는거야.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할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어. 이 사람의 마음은 절대로 마리사에게 전해지지 않아. 전해져서는 안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 뿐이어서 앨리스는 이를 강하게 악물었다.

이렇게나, 모든 걸 알아버렸는데도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사진."

 

갑자기, 키리사메 부인이 중얼거려 앨리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부인의 입가에 뭔가 자랑스러워 하는 듯 한, 상냥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예전에 텐구가 찍은 사진을 보았지요. 스펠카드 룰에 기반한, 명예로운 결투의 사진을."

"그건, 혹시......."

 

───인화되자마자 받아왔다구. 잘 찍혔지?

 

"그 애가 만든...... 저기, 탄막, 이라고 하는 건가요?"

".......네."

"그래, 탄막. 그게, 너무나 아름답게 찍혀 있더군요. 그 애가 이걸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찬답니다."

 

───요괴의 산은 물론이고 사람 마을에서까지 인기가 끝내준다고 하더라구!

 

"정말 아름다워서...... 이 사진을 본 사람들 모두에게 이건 제 딸이 만든 겁니다, 라고, 이렇게나 아름다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제 딸입니다, 라고, 자랑하며 돌아다니고 싶었죠."

 

───이걸 보면 누구라도 감동해서

 

"....... 그 애의 곁에서 탄막을 올려다보며, 아름답다고 칭찬해 줄 수 없는 게 정말로 유감스럽고 분해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애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데도."

 

───어떤 녀석이라도 마법을 엄청 좋아하게 될 게 틀림없다구!

 

'...... 마리사!'

 

참지 못하고, 앨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너란 애는, 정말,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서투르고, 고집쟁이에, 제멋대로고, 삐뚤어진 녀석에........ 슬플 정도로 올곧아서.'

 

울어선 안돼, 자기는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건 눈 앞에 있는 사람인데........ 마음 속으로 필사적으로 말해도, 아무리 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앨리스를, 갑자기, 따뜻한 것이 안아왔다.

놀라 고개를 들자 상냥하게 고개를 든 키리사메 부인이 앨리스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그 순간, 부인이 기침을 한 번 했다.

 

"아, 안돼요, 그런 걸 하면........!"

"괜찮, 아요. 적어도, 이 정도는, 하게 해 주세요."

 

격한 기침을 하면서도 부인은 변명하듯 작게 말했다.

 

"슬픈 생각을 하게 해 버려서, 정말로, 죄송하네요."

 

사과하지 않아 줬으면 했다. 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심하게 기침을 하는 부인에게 안기는 것도 나오지 못하고, 앨리스는 한동안 계속 울었다.

 

앨리스가 울음을 그친 뒤, 부인은 안도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얼마간 지나자 기침도 멈추고, 어느 정도 안색도 좋아졌다.

 

'정말로, 마법에 대해 거부반응이 나타나는구나.'

 

앨리스는 씁쓸한 느낌으로 분석했다. 확실히, 이래서는 증상을 숨기는 건 무리였겠지. 마리사가 마법을 배우는 한, 이렇게 되는 건 필연이었던 것이다.

 

"앨리스 씨."

 

갑자기 부인이 입을 열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탁하는 듯 한 표정을 띄웠다.

 

"저에게,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딸애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가지로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올곧은 애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다만, 저도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적어서요."

"당신같이 상냥한 분이 곁에 있어 주는 걸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인은 지친 듯, 하지만 만족스러운 듯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뭔가, 해주고싶어.'

 

앨리스는 갑갑했다. 뭔가, 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을까.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해서 딸의 마음을 지켜낸 사람에게, 작은 보상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 어도 마리사가 부모에게 복잡한 기분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하다. 요 수일간 보인 이상한 태도도 그렇고, 애초에 '키리사메 마법점' 이라는, 마치 부모님의 '키리사메점'을 배껴온 듯 한 이름을 자기 가게에 붙이는 것 자체가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증명해주고 있다. 어떤 감회라도 없었다면 굳이 그런 이름을 썼을 리도 없었다.

 

'...... 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마리사가.......'

 

───묘하게 그리운 맛이란 말이지.

 

그 말과 함께 신키가 기뻐하는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쿠키."

"네?"

 

앨리스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키리사메 부인이 눈을 떴다.

 

"갑자기 왠 쿠키인가요?"

"아니요, 저기, 그."

 

스스로도 어째서 그런 걸 말했는지 모르겠다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쿠키라는 단어를 핵심으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어떤 근거도 없는,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았지만.

 

"저기, 혹시, 마리사가 가게에 있었을 때, 쿠키라던가를 만들어준 적이 있으셨나요?"

"네? 아아, 네."

 

키리사메 부인이 그리운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만들어 줬었답니다. 남편은 일식파여서 딸은 양과자를 거의 먹지 못했지만...... 한 번 변덕으로 쿠키를 만들어 줬더니 묘하게 마음에 든 모양이라서."

"꽤 단 쿠키가 아니었나요?"

"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설탕의 양을 조절 못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먹지 못했지만....... 그 애만은 맛있다는 듯이 계속 먹어 주었습니다. 그 뒤로는 간식을 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저기, 쿠키는?' 이라며 졸라댔죠. 그립군요."

 

앨리스는 뛰쳐나갈 듯이 기뻤다. 그 감정에 모든 걸 맡기고 부인에게 다가가 강하게 손을 잡았다.

 

"지금도 그래요!"

"네?"

"마리사, 저희 집에 올 때마다 엄청난 기세로 쿠키를 집어먹는걸요! 정말로 기쁜 듯 한 표정으로. 그리고 쿠키 이외의 양과자에는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어요. 저기,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저기."

 

어리둥절한 모습의 키리사메 부인을 보자, 앨리스는 갑갑했다. 아직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은 그녀에게, 말해 주자.

 

"마리사는 쿠키를 싫어하지 않아요. 예전 집에서의 기억과 관련된 거라며, 자기가 거부한 적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즉, 어머니가 구워준 쿠키를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 그 애에게 있단 말이에요!"

 

흥 분한 채 늘어놓은 말에는 과장과 추측이 있었지만 앨리스는 그런 건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이 사람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구원받는다면,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해 주마. 염마가 화내든, 알 바냐. 지옥에 떨어뜨리려면 떨어뜨리라고 해.

그렇게 혼자 들떠올라 숨을 헐떡이는 앨리스의 앞에서, 키리사메 부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휘둥그래 뜨고 아연해 있다가, 갑자기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앨리스는 허둥지둥 부인의 손을 놓았다.

부인은 한동안 기침을 하다가 이윽고, 기침을 멈추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 앨리스 씨."

"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몇 년치의 고인 눈물을 단숨에 짜내듯, 부인은 조용히,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곁에서 그녀를 지켜봐주며, 앨리스는 입울 꾹 다물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안아줄 수 없는 게, 참을 수 없이 안타까웠다.

 

 

 

 

 

 

 

"......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니요, 신경쓰지 말아 주세요."

 

키리사메점의 뒷문에 서서,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 몇 시간,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졌고,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앨리스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부인을 배웅했다. 다행히 요괴와 만나는 일 없이 조용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 그 앤, 이젠 자고 있으려나."

 

마법의 숲 방향을 바라보면서 키리사메 부인이 중얼거리며 눈을 살짝 감았다. 앨리스도 같은 방향을 보며 고개를 작개 갸웃거렸다.

 

"어떠려나요. 아직 자지 않고 책이라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엄청난 노력가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앨리스는 마리사가 아직 일어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침대에서, 혹은 책상에 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머니가 신경쓰여서 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일 즈음에 상태를 보러 올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앨리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저기, 이런 걸 이제 와서 확인해도 될 지 모르겠는데요."

"네?"

"마리사를...... 저기."

 

그 말을 꺼내기가 멋쩍어서 앨리스는 삼켜버렸다. 하지만 키리사메 부인은 그걸로도 알겠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네, 물론 사랑하고 있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랑스러운 딸인걸요."

"그런가요."

 

앨리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잘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제대로 전해주겠습니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직접 만나지 않고도, 말로 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있으니까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곤혹스러워하는 부인을 안심시키듯, 앨리스는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에 댔다.

 

 

 

 

 

다음 날, 아직 주변이 새벽녘의 어스름에 잠겨 있을 때, 마법의 숲의 마가트로이드 저택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어제 밤부터 앨리스는 한 숨도 자지 않았다. 키리사메점에서 돌아온 뒤로 집안을 정리하거나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등, 인형들과 힘쓰고 있었다.

 

'..... 정말로, 잠을 전혀 자지 않아도 괜찮구나, 내 몸.'

 

새삼스럽게 그런 걸 깨달았다. 마법사라는 종족인 이상 당연한 것이지만 앨리스는 아직 옛 습관대로 잠이나 식사를 인간처럼 하고 있었다.

 

'뭐,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마 계의 신이면서 전병을 한 손에 들고 차를 다른 쪽 손에 든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앨리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마실게!''안됩니다, 참아 주세요!' 라며, 반쯤 울상이 된 유메코가 어머니의 발에 메달린 모습을 생각하자 앞으로도 '인간 같은 마법사'로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 때, 앨리스는 누군가가 집으로 오고 있는 걸 알아챘다.

 

'.....왔구나. 근데 너무 빨라.' 

 

아직 오전 5시다. 예상대로, 저쪽 역시 한 숨도 자지 못한 듯 싶다.

앨리스는 현관으로 친구를 마중나갔다. 이미 준비는 끝나 있었다. 남은 건 안으로 들여보내서 제대로 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언제까지고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하며 슬쩍 창문 쪽을 보니 본 적 있는 둥근 모자가 창틀 쪽으로 숨고 있었다. 아무래도 벽에 바싹 붙어 안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꼬인 녀석.'

 

앨리스는 반쯤 ​질리면서도 소리없이 창가로 걸아가 단숨에 열었다.

 

"꺄악"

 

창 아래에서 귀여운 비명이 들렸다. 얼굴을 내밀어 들여다보니 아니나다를까, 그곳엔 흑백의 마법사가 있었다.

 

"안녕, 그런 곳에서 뭐해?"

"아, 아무것도."

 

마리사는 울컥한 듯 말했지만 힐끔힐끔 이쪽을 보며 집 안을 신경쓰는 듯 했다.

어쩔 수 없네, 하고 생각하며, 앨리스는 가능한 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제, 저번에 말했던 손님이 왔었는데 말야."

"그, 그래."

"벌써 돌아가셨으니까, 없어."

"흐, 흥. 딱히 나하곤 관계없는 일인걸."

"그렇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앨리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마리사는 이쪽을 올려다보며 화난 듯 외쳤다.

 

"뭐야!"

"뭐가."

"아, 아니....."

 

마리사는 얼마간 우물쭈물거렸지만, 이윽고 기세좋게 일어나서 이쪽을 손가락질하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어, 어제는 말야!"

"응?"

"어제는........ 그거야, 마법을 시험삼아 쏜 것 뿐이니까 말야! 딱히,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

"아무도 그런 건 묻지 않았는데."

 

앨리스가 담담하게 말하자 마리사는 입을 연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침묵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앨리스는 서서히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뭐, 뭐야!? 어제 일이라면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들어오지 않을거야?"

 

집 안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리사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들어갈게, 들어간다구!"

 

라며, 발소리를 올리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왜 화를 내는건데."

"화 안냈어!"

 

앨리스는 살짝 웃었다.

 

거 실로 와 의자에 앉으면서도 마리사는 안절부절거리며 진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치 뭔가의 흔적을 찾는 듯, 힐끔힐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그 반대편의 의자에 앉아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 저기."

"왜 그래."

"왠지, 유난히 준비가 잘 된 것 같은데....."

 

마리사가 모자 아래서 불안한 듯 눈을 치켜뜨고 앨리스를 보고 있었다.

 

"오늘도, 누가 오거나 하는거야.....?"

"아니, 딱히 아무도 올 예정 없는데."

"진짜로?"

"진짜."

"그럼 왜 이렇게 준비가 잘 된 거야?"

"아침에 인형들과 함께 다과회를 하려고 했거든."

"아, 그러냐........"

 

어딘지 한 숨 돌린 듯 한, 그러면서도 유감스러운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리사는 문득 생각난 듯이 웃었다.

 

"하, 핫. 역시 환상향 제일로 친구가 없는 여자의 자리를 앞으로도 사수하려는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님이시구만! 인형들과 다과회라니, 차원이 다르구만!"

"어머, 친구 정도는 있어."

"뭐, 뭣이!? 누구야?"

"너잖아."

 

척 하고 가리키자, 마리사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갑자기 뭘"

"뭐, 농담이지만."

".......뭐야!"

"뭐가."

"아, 아니......."

 

마리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들을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어제 그 사람 말야."

 

갑자기 앨리스가 말하자 마리사는 움찔했다.

 

"뭐, 뭐라구?"

" 집에 돌아간 뒤에 인형으로 관찰해 봤는데, 상당히 건강한 사람이었어. 딱히 아픈 것도 없어 보였고, 너무 살찌거나 마르지도 않은 것 처럼 보였어. 오래 살겠지, 분명. 물론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 주제에 이런 곳까지 걸어온 시점에서 건강하지 않을 리 없었지만."

"아, 흥."

 

슬쩍 보자, 마리사는 왠지 안심한 듯 한 표정을 지었지만 앨리스의 시선을 느끼자 그걸 숨기듯, 한 눈을 팔았다.

 

"헤, 헤에, 다른 사람의 건강상태까지 신경쓰다니, 왠 엉뚱한 짓을 하는거야."

"어라, 몰랐어?"

"뭐가?"

"내가 손님을 거부하지 않는 건, 인형의 눈을 통해 사람의 몸의 구조를 관찰해서 인형제작에 참고하기 위해서인걸."

"뭣, 진짜냐!?"

"그래, 정말이야. 참고로 네 신장과 체중, 덤으로 쓰리 사이즈까지 파악했지."

"그, 그만둬! 보지마 변태!"

 

마리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눈물까지 그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양팔로 가렸다. 앨리스는 그 앞에서 홍차를 마시며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

 

"몸부림치는 와중에 미안하지만, 네 몸은 욕정할 정도로 매력적이진 않아."

"뭣"

" 뭐, 오래된 악연이니까 의학적 시점에서 충고해 주겠는데, 너는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버섯이라면 무엇이든지 입에 집어넣는 건 그만둬. 덤으로 남의 것을 멋대로 훔쳐가는 것도 그만둬. 이걸로 확실히 건강해 질거야."

"아니, 마지막 건 명백하게 상관없잖아."

 

딴죽을 건 뒤, 마리사는 입을 삐죽였다.

 

"흥, 뭐가 의학적인 시점이냐. 아~ 싫다 싫어. 인형놀이 다음엔 의사놀이냐! 너는 그거냐, 야고코로 앨링이냐!"

"그건 또 누구야."

"시꺼, 이제부터 널 앨링 야고코로이드라고 불러주마! 앨링앨링, 도와줘요 앨링!"

"영문 모를 말 하지 마."

 

앨리스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냈다. 한 인형이 커다란 자루를 안고 날아와 탁자 위의 접시에 내용물을 부었다.

그걸 본 마리사가 토라진 듯 입을 씰룩였다.

 

"뭐야, 또 엄마의 쿠기냐. 의미 없이 손을 튕기는 연출이나 하고 말야."

"아니야, 기건 내가 구운거야."

"흥, 뭐, 기껏 만들었으니 먹어 주지."

 

마리사는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쿠키를 하나 집어먹었다.

그 순간, 놀란 듯 이 눈을 번쩍 뜨고 한 입 베어문 쿠키를 바라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마리사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오르고, 이윽고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앨리스가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랑곳않고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아냐, 아무것도."

 

마리사는 당황하며 모자의 챙을 아래로 잡아당겨 표정을 감추고선 한동안 아작아작 쿠키를 씹어먹은 뒤, 어딘가 망설이는 듯 눈을 치켜뜨고 앨리스를 올려다봤다.

 

"왠지 평소랑 맛이 다른데. 정말로 네가 구운거야?"

"응, 내가 구웠어. 중요한 만드는 법은 어제 왔던 사람에게서 배웠지만 말야. 맛은 괜찮으려나?"

"마, 맛있어."

 

말하면서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 뭐야 이건, 이런 건"

 

마리사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술만 움직였을 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얼마간의 침묵. 앨리스는 쿠키에는 한 번도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홍차만을 마시고 있었다.

마리사는 양손을 허벅지 사이에 놓고 안절부절 못했지만, 이윽고 침을 꿀꺽 삼키며 질문했다.

 

"어, 어이, 앨리스?"

"왜?"

"저기, 이거, 이거 말야, 이 쿠키 말인데."

 

겸손하게,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이거, 가져가도 될까.........?"
"딱히 상관없어."

 

앨리스는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정말이냐!?"

 

마리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걸 바라보며 앨리스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였다.

 

"너답지 않네. 이런 거에 일일이 허락을 받아내다니."

 

마리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하며 쿠키를 하나도 남김없이 자루에 담고서 꽉 묶었다.

그리고 나선 덜커덕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서 일어나 초조한 듯이 큰 소리로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핫, 방심했구나, 앨링 야고코로이드!"

"그 소재를 다시 쓰는 거구나."

"이 맛없....... 지는 않지만 그다지 맛있는 것도 아닌, 아무리 봐도 미묘한 맛의 쿠키는"

"너무 길어."

"시, 시끄러워! 어쨌든, 이건 전부 내꺼라니깐! 너에겐 하나도 주지 않을거야! 헤헷, 어떠냐, 꼴 좋다!"

"그래. 그건 큰일이네."

 

앨리스는 조용히 홍차를 마셨다. 그 사이에 인형이 날아와서 텅 비어버린 접시에 아까의 것과 같은 모양의 쿠키를 보충했다.

쿠키로 가득 찬 자루를 든 그대로 경직된 마리사에게 앨리스는 그 때서야 알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한 포대 더 갖고싶니?" 

"우갸아앗!"

 

갑자기 절규하는 마리사는 쿠키 자루를 든 손으로 빗자루까지 쥐더니 번개같이 현관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았을 때 휙 돌아보며,

 

"기억해 둬!"

"그래. 그 쿠키를 만드는 법이라면 완벽하게 기억해 뒀으니까, 언제라도 만들어 줄게."

 

태연스래 대답하는 앨리스에게 얼 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이를 간 뒤, 마리사는 엄청난 기세로 밖을 향해 뛰쳐나갔지만 얼마 가지 못해 '흐갹!' 소리와 함께 거창하게 넘어졌다. 그러고 나서 당황한 모습으로 쿠키가 자루에서 쏟아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호들갑을 떨며 안도의 한숨을 쉰 뒤, 이번엔 빗자루와 같이 가슴에 끌어안고선 달려나갔다.

 

'날아가면 될 걸.'

 

현관에 서서 쓴웃음을 지으며, 앨리스는 친구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어느세 시야가 흐려져 멀어져가는 마리사의 모습이 주변의 경치와 겹쳐보여 잘 보이지 않게 됐다.

살짝 눈물을 닦으며 앨리스는 마음 속으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그렇게, 소중하게 안고 가, 마리사. 넘어져 구르더라도 잃어버리는 일 없도록.'

 

그렇게 친구가 아예 보이지 않게 된 뒤, 앨리스는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다녀간 뒤, 탁자에 놓여진 접시 위에 가지런히 담긴 쿠키 하나에 손을 뻗어 한 입 먹고선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미묘하게 맛이 다르네.'

 

후,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쿠키는 확실히 앨리스 자신이 구운 쿠키였지만, 마리사가 가져간 자루에 든 건 키리사메 부인이 구운 것이었다. 어제 그녀를 가게까지 데려다 준 뒤에 구웠던 것이었다.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앨리스가 말했지만, 키리사메 부인은 어떻게든 스스로 굽겠다, 당신도 만드는 모습을 봐 주었으면 한다며 듣지 않았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사람들과, 곁에 선 앨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부인은 기침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쿠키를 구웠다. 다 구웠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해서,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부축받아 어디론가 가 버렸다.

잠시 후 돌아온 건 주인 혼자서였다. 그는 자루에 담은 쿠키를 두 손을 모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딸애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와 나눈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자기가 구운 쿠키를 말없이 먹으며 앨리스는 마리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쿠키를 한 입 베어물고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째서' 라고 중얼거리던, 울 것만 같았던 표정을.

 

'분명, 맛이 변하지 않았던 거겠지.'

 

애초에 키리사메 부인이 쿠키를 굽는 걸 곁에서 보았을 때도 도저히 오랜만에 만들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 그 맛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구워왔던 거겠지.

그걸 기뻐하며 먹어줄 딸이 집을 나가버린 뒤로도 계속해서.

 

'저기, 마리사.'

 

마음 속으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말야, 네 탄막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셨어.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엄청나게 기쁜 얼굴로 말야. 널 아주 사랑한다고, 상냥하게 미소지으면서.'

 

그 비비 꼬인 여자애를 끌어안아 주고서 귀에 대고 속삭여 줬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그건 절대로 해선 안되는 일이다. 자신은 앞으로도 이런 마음을 안고서 친구를 바라봐 줄 수 밖에 없다. 키리사메 부인이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 처럼.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와, 앨리스는 당황하며 눈가를 닦았다.

 

'이상하네.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었나.'

 

환상향으로 나와서 바뀐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쁘게 변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은 지금 이렇게나 평온한 기분이 드는 것일 테니까.

 

"그럼"

 

앨리스는 홍차를 다 마시고 인형에게 탁자 정리를 시켰다. 한 가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냈기 때문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서재 겸 침실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밋밋한 문장이 적힌 편지와 어머니께 받은 쿠키 상자가 며칠 전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앨리스는 우선, 이젠 필요없는 밋밋한 편지를 정리하고서 새 편지지에 딱 한 줄을 적었다.

 

───당신의 마음은 전해졌습니다.

 

그걸 봉투에 넣고 봉인했다. 남은 건 키리사메점까지 전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쉽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긴 한숨을 쉬며 일단 그 편지를 밀어놓고, 다시 새 편지지를 꺼냈다.

 

'....... 벌써 마계에서 다음 편지가 두 통이나 와버렸구나.'

 

두 통 다 답장이 없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저기, 유메코쨩. 앨리스쨩 괜찮으려나. 나쁜 사람에게 붙잡힌 건 아닐까.""아니, 평범하게 귀찮아하는 걸로 보입니다만.""앨리스쨩은 그런 아이가 아닌걸!" 이라며 주고 받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이제 슬슬 자식에게서 독립해요, 어머니........'

 

───그건 나도 똑같나.

 

쓴웃음지으며 책상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팬을 잡았다. 지금이라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문 득 생각나서 책상 구석의 상자를 열고 어머니의 쿠키를 한 입 베어물자, 그리운 맛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지금의 자기에겐 너무 단 맛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맛있다고 느껴, 가슴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이런 자신이, 솔직히 기쁘다.

앨리스는 다시 눈가를 닦고 열없는 웃음을 지었다. 상자의 뚜껑을 닫고, 다시 팬을 쥐었다.

무엇을 적을까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친구에 대해서였다.

어쩌면 오늘, 어머니의 쿠키를 먹으며 혼자 혼자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팬은 가뿐히 글을 써 나갔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끝-













작가 후기

 

'추천 BGM 컨트리 로드' 같은.


멋진 마리사나 귀여운 마리사가 아닌, 사랑스러운 마리사를 써 보고 싶었다........ 라던가 말던가 하고 있습니다.

으으, 징그러워라.......

 

 

음ㅡ, 일단, 변명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동방향림당 원작을 한 편도 읽은 적이 없고, 또 읽을 방법도 없는 관계로, 어쩌면 이번 이야기는 향림당과는 제대로 모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그냥 넘어가 주시면 고마우려나, 생각합니다.

 

한 번 다시 읽어봤습니다만, 아마 아직 오, 탈자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발견해 주신 분께서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자 후기

 

안녕하세요, 청전 Lumius입니다.

 

군대에서 시간에 쫓기는 몸으로 번역하자니 번역퀄이 스스로 봐도 마음에 들질 않는군요.

읽게 될 독자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항상 그렇듯, 군대에서 번역하다 보니 초벌 글을 그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번역의 질이 그다지 좋진 않지만 욕심이 앞서다 보니 문장을 수정하는 건 뒷전이 됐네요.......

 

 

다음 번역은 aho 씨의 작품 중 최고라고도 하는 '때로는 옛날 이야기를'입니다.

하지만 번역 자체는 수능이 끝난 뒤에, 어쩌면 파견근무가 끝난 뒤에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12월부터 번역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당장 파견이 끝난 뒤로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생길지도 모르니 옛날 이야기는 좀 정성들여서 번역하겠습니다.

 

 

 

 

 

허접한 번역글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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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할망구!  (0) 2014.08.17
Posted by 청전Lumius
,

본 번역물은 동방창상화의 aho 작가의 작품을 작가의 허락을 받아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글의 저작권은 aho 님에게 있으며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줄 간격은 원작의 줄 간격에 맞춰 띄우고 있으므로 조금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전Lumius-

원작 URL - http://coolier-new.sytes.net:8080/sosowa/ssw_l/59/1221409268

원작 투고 시기 - 2008년 9월 15일


 

 

"수고했어 할망구!"

 

이건 간만의 난제구나, 하고 야쿠모 유카리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어린이에게 할망구 소리를 들었을 때 사람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음, 조금 생각해 볼까.

 

순간적인 감정에 몸을 맡겨 아이를 날려버리는, 그런 솔직한 마음의 대응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너무 생각이 짧다. 대요괴의 몸으로서 무수한 선택지를 갖가지 각도에서 검증해 보아야만 한다.

 

'......일단은 상황을 정리해 보자.'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왠지 한낮에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를 긁적이며 '아~암, 졸려~' 라며 방의 미닫이문을 연 순간에 눈앞이 꽃으로 가득 찼다.

이게 뭐야,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 꽃들은 어께 옆을 지나가더니 두 명의 소녀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한 명은 유카리의 식신인 란의 식신, 첸이고 다른 한 명은 얼음의 요정인 치르노.

둘은 자주 같이 놀기에 이 둘이 같이 있는 것 자체는 딱히 별난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둘은 미닫이문 바깥의 툇마루에 서서 유카리가 나오는 걸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 둘이 양 손에 꽃다발 같은 걸 갖고 있는 걸까, 하고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을 때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은 그 애들이 양쪽에서 꽃다발을 내밀며 아까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 상황, 정말 의미를 모르겠는걸. 하지만 괜찮아. 난 환상향이 자랑하는 이과 미소녀인걸. 그래, 이과계열 미소녀야. 이과계, 미소녀. 다음에 할 행동을 결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인걸.'


유카리는 조용하고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지금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갖가지 정보를 무한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방대한 수의 수식으로 엮어내어 온갖 값을 산출해 최고의 해답을 도출해낸다.


'.......일단은 틈새로 끌고 들어가서 한 시간 정도만 설교하도록 할까.'


조금 진부하고 흔한 결론을 내버렸지만 이걸로 됐다.

선택지는 거의 무한에 가까웠다. 이 결론에 다다를 때 까지 유카리의 머릿속에 있는 치르노는 1만 번 정도 증발했고 10만 번 정도 갈가리 찢어지고 100만 번 정도 자이언트 스윙으로 던져져 날아갔다.

그 정도의 분노를 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평화적인 해결책을 선택해낸 자신에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얍! 역시 환상향 최고의 대요괴! 이과계 미소녀는 겉멋으로 하는 게 아니란 말씀!

덧붙여서 첸에 대해선 처음부터 설교만 할 생각이었다. 강한 벌을 내리려 하자 머릿속의 란이 매달리면서 울부짖어 상당히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신속하게 설교용 틈새방으로.......'


그렇게 평소 하던 대로 통로의 틈을 열려고 하자 유카리는 문득 눈치챘다.

지금, 얼굴 가득히 웃음짓고 꽃다발을 내미는 치르노와 첸의 뒤에 달리 몇 명인가의 사람과 요괴가 서 있었다. 언제나 치르노나 첸과 같이 노는 친구들인 리글, 미스티아, 루미아, 대요정이었다. 더욱이 그녀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있어서 보니 ​유카리의 식신인 란도 끼어 있었다.

치르노와 첸과 달리 다른 소녀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아니, 웃고 있다고 한다면 웃고는 있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을 뿐. 루미아만 상황을 잘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있었지만.

 

'....... 다른 애들은 아까 한 말이 엄청나게 실례되고 당상 살해당해도 될 정도의 말이라는 걸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도 없이 제대로 알고 있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왜 치르노랑 첸을 막지 않은걸까? 유카리의 마음속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어디의 누가 어디서부터 보더라도 완벽한 미소녀인 자신에게 조금 짓궂고 머리는 좀 안좋지만 기본적으론 솔직해서 좋은 애들인 치르노와 첸이 '수고했어 할망구!' 같은 말을 했다.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어떤 이유에서든 이 영원한 미소녀를 할망구라고 부른 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하지만 벌을 주는 건 잠시 보류하도록 하자. 일단은 진상 규명을 해야지.

 

'그렇다곤 해도 나정도 되는 사람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버리다니.'

 

유카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환상향이 성립된 것에 관계해서 대요괴라는 이름으로 모두에게 두려움받고 기분 나쁘다고 듣고 덤으로 수상하다고까지 여겨지길 벌써 수 백년. 얼굴에 대고 할망구라 불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조금 지나치게 화를 내 버린 건 아닌가 싶다.


'이러면 안되지. 언제 어디서나 여유를 잔뜩 갖고, 인간미 넘치는 언동은 시(詩)적으로 멋지게 보일 수 있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무례 정도는 요염하고 섹시하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이, 환상향이 자랑하는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 야쿠모 유카리의 장점인걸. 이런 어린 요괴와 바보 요정을 상대로 일일이 잡아찢어서는 카리스마를 지키기 힘든걸, 응.'


어쨌든 일단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유카리는 눈앞의 치르노와 첸을 향해 생긋 하고 미소를 지었다.

덧붙여서 '수고했어 할망구!'라고 듣고 나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1초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틈새 요괴의 생각은 인간이나 다른 요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역시 영원한 이과계 미소녀, 머리도 몸도 늙는 것과는 관계 없어! 라며 유카리는 마음 속 자신에게 칭찬했다.


"두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잘 듣지 못했단다. 다시 한 번 말해줄 수 있을까?"


상냥한 미소를 짓고 조금 허리를 숙이며 유카리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보든 완벽하다. 역시 영원의 미소녀. 할망구라고 불릴 부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라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유카리의 앞에서 치르노와 첸은 함박웃음을 지은 체로 대답했다.


"수고했어 할망구!"


.......일단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과 자신이 '할망구'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 것 보다 더욱 화를 내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유카리의 상상 속에서 치르노가 1000만 번 정도 전철에 치어 죽었다. 그 옆에서는 첸의 무참한 시체를 끌어안은 란이 슬픔의 표효를 외치며 금색의 아우라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 화났어 할망구-! 브루투스 너마저.


'아니아니, 공상 속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지.


유카리는 끓어넘칠 것 같은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겉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두 사람 다 미안해. 너희들이 말한 것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겠는걸."

"에~엣. 유카리님에게도 모르는 게 있나요!"


첸이 놀라서 외쳤다. 그녀의 말로는 즉 야쿠모 유카리는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통하며 그 자체로도 대견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속죄가 되지 않는다.


"어머, 첸. 잘 알고 있구나. 물론 나에겐 모르는 건 없단다. 그렇지, 조금 말을 바꾸어 볼까. 방금 한 말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 너희들의 입으로 직접 이 나에게 설명해 주길 바라는 거란다."


유카리는 생긋 미소지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요정은 눈에 눈물이 맺히고 리글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으며 미스티아가 유서와도 같은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상황을 모르는 루미아 이외에는 유카리로부터 풍기는 압박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란도 란 나름 어떻게든 주인을 달래보려 했지만 나설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은 모른 채 치르노가 힘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유카리는 훌륭하니까 감사를 하러 온 거야!"


또 영문을 모를 이야기다.


'내가 훌륭하다고 하는 건 모를 일도 아니지만 감사를 하러 왔다니....... 응? 뭐야. 그럼 '수고했어 할망구!' 는 감사를 표하는 말이었단 말야?


그걸 감사의 말로서 받아들인다니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라는 생각을 하는 유카리였다. 나는 어딘가의 천인이 아니란 말야.

애초에 치르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유카리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한숨을 쉬며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 당신, 이 상황, 정리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예, 옙!"


지명된 대요정이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왔다. 온화하고 청초한 이미지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엉망이 됐다.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지.'


유카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치르노가 '다이쨩 왜 무서워하는거야' 라며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표정도 웃음을 자아낸다.


"저기, 그, 유카리님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대요정이 긴장해서 고조된 목소리로 물어왔다. 유카리는 극히 평범하게 대답했다.


"경로의 날이구나."


그것 자체는 조금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부터 치르노와 아이들의 말에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는 것을.


"그, 그래요. 경로의 날이에요. 저희들은 전에 인간 마을의 케이네 선생님께 그걸 배운 적이 있었어요. 그, 지금 저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만드신 나이 많으신 분들께 경애와 감사를 드리는 날이라고 들었어요."

"호오. 즉 너희들은 이 나, 야쿠모 유카리를 틈새요괴 할망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구나."


관자놀이 부근을 조금 잡아당겼다. '힉' 하고 짧은 비명을 내며 대요정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됐다. 아니, 말문이 막힌 건 둘째치고 대요괴의 노기를 가까이서 뒤집어 쓰고도 오줌이 새어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래 맞아"


경직돼 버린 대요정 대신에 다시 치르노가 힘차게 말했다.


"유카리는 예전부터 환상향을 위해 힘내 준 훌륭한 할머니니까 제대로 존경을 표하라고 들었어."


이걸로 결정. 역시 이 바보 요정은 자신을 노파로 인식하고 있다. 이 무슨 무례함과 모욕인가.


'하지만'


유카리는 눈앞의 요정을, 한 치의 악의도 없는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거기엔 악의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이쪽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는 존경과 경의로 차 있는 듯이 보였다.

흘끗 첸에게 눈을 돌리자 이쪽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경우 유카리는 주인의 주인에 걸맞는 위대한 요괴인 만큼 눈에 존경의 표시가 드러나는 건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감정이 한층 더 깊어진 듯이 보였다.


'왠지 화내기 껄끄러워져버렸는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상한 냄새가 난다든가 거북하다고 꺼려지는 현재, 유카리는 이런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호의의 표현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 때문에 드믈게도 생각이 이리저리 휘말려 몇 초인가 다음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에 치르노가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한다.


"그래서 말야, 유카리의 무용담을 잔뜩 들어서 이 몸이 '유카리 멋져~!'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감사의 말과 함께 이것을 가지고 있으렴' 이라고 해서 이 꽃 받은거야. 수고했어 할망구 라는 말도 그 때 배운 거야."


점점 사건의 진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으며 유카리는 첸에게 물었다.


"그, '수고했어 할망구'라는 말은 어떤 뜻이라고 배우고 온 거니?"

"으~음, '환상향에는 존재하지 않는 바깥 세계의 말로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최고의 칭찬이 되니까 꼭 말해주렴. 유카리는 바깥 세계의 지식도 깊으니 무조건 기뻐해 줄거야' 라고."


설명한 뒤에 첸은 불안하게 유카리를 올려다 보았다.


"저기, 혹시 뭔가 잘못된 건가요?"


당연하잖아의심좀해라이바보고양아.

그렇게 몰아치고 싶어지는 걸 유카리는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일단 이 애들에게 악의가 없는 건 알았다. 그러니 대신에 란을 노려보았다.


'이 고양이, 사람을 의심한다는 걸 너무 모르는데. 당신 대체 어떻게 교육한 거야?'

'솔직해서 귀엽지 않으십니까. 첸 귀엽다구요 첸.'

'사고가 치르노랑 같은 레벨이라는 거에 대해서 의견을 내 봐.'


눈이 마주친 한 순간의 끝에 란은 말없이 눈을 돌린다. 이 바보 여우 나중에 체벌 결정이야, 라며 유카리는 작게 이를 갈았다.

그 때 시야에 세 개의 그림자가 날아왔다.


"죄송합니다!"

"악의는 없었어!"

"부디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머리를 숙인 건 대요정과 미스티아, 그리고 리글이었다.

용서받지 못했다간 치르노와 첸이 먼지 한 톨 남김없이 소멸해버릴 거라고라도 생각하는지 필사적이다.

그걸 본 치르노와 첸이 멍하게 입을 벌리고 뒤에서는 루미아가 뚜벅 뚜벅 걸어왔다.


"다들 왜 사과하고 있는거야?"

"됐으니까 루미아도 고개 숙여!"

"왜 그래~"

"나중에 장어 먹여줄테니까."

"그런가아~"

 

숙인 머리가 넷이 됐다. 유카리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니 그냥 두면 될 텐데 친구들에 대한 마음이 상당하구나.'


흐믓하게 생각하면서, 어디, 이건 점점 화내기 힘들어지네, 라고 유카리는 작게 한숨을 쉰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파악했으니 애초에 이 애들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어졌지만.


"저기 말야 유카리"


치르노가 불안하게 유카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몸들 뭔가 나쁜 말 했어?"

"죄송합니다 유카리님."


울 것 같은 치르노와 축 처진 귀를 늘어뜨리고 면목 없는 듯이 있는 첸을 보고 있으니 왠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유카리는 살짝 미소지으며 쭈그려 앉아 둘을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상한 것 같은 건 말하지 않았단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나답지 않은 걸 하고 있네' 라며 유카리는 마음 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대요괴에게도 망설임을 가져다 주는 듯 싶다.


'응, 그런대로 평소처럼의 분위기로 넘겨버리면 되는 거겠지.'


유카리는 둘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틈새 사이로 란에게 넘겨보냈다.


"거실에라도 꾸며둬 주렴."

"알겠습니다."


란이 평온하게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치르노와 첸의 표정이 확 하고 밝아지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숨을 내쉰다.


"그건 그렇고."


하지만, 유카리에게 있어 진짜는 이제부터다.


"내 무용담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들은 거니?"

"그게 말야, 유카리가 아주 오래 전에 환상향을 만들었다던가 갈 곳 없는 요괴들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불러들였다던가 지금도 그 결계가 부서지지 않도록 힘써주고 있다던가 이 몸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준다던가."


치르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몸 최강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카리도 최강이니까 역시 최강끼리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

"어머, 그러니. 그건 영광이구나."

"저도 유카리님의 위업을 자세히 들은 건 처음이어서 엄청 감동했었어요! 그래서 분수도 모르는 몸이지만 뭔가 해드리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첸도 고개를 들어올리며 엄청난 열의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녀석들, 하고 생각하면서 유카리는 머리를 굴렸다.

즉, 누가 치르노와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걸 집어넣었는가에 대해서였다.


'환상향을 내가 만들었다, 란 건 다소 잘못되긴 했지만 그런 옛날 일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다는 건 환상향에서도 꽤 높은 위치의 요괴란 거네. 그래서 치르노와 첸에게 '수고했어 할망구!' 라고 말하게 해서 나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히려고 계획했다는 거지. 거기에 그에 대한 보복도 무서워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유도하고 있어. 호전적이고 전투력에 자신 있는 녀석.'


대요정과 아이들이 여기에 올 때 까지 치르노와 첸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지 못한 건 아마 그 요괴에게 협박당해서겠지.


'그렇게나 정성들어 괴롭히는 짓을 하는 녀석. 그리고 빈틈이 없어.'


유카리는 슬쩍 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식신에게 아까 넘겨줬던 다채로운 꽃의 다발.

서향꽃, 스태티스, 제라늄, 글로리오사, 석남화, 나팔나리, 국화, 카틀레야, 모란채 등등.

자세히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각 계절별 꽃이 한 곳에 섞여 있어 통일감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그 꽃들 한 가운데에 꽃잎을 펼친 크디큰 해바라기.


'응, 이거면 문제없겠네.'


딱히 문제라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유카리는 공간에 틈새를 열어 아무렇게나 팔을 쑤셔넣어 저편에 있는 사람의 목덜미를 잡아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저항은 없었다. 매우 사뿐하게 유카리의 방에 내려선 그 사람은 양산 밑에서 우아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어머, 평안하신지요 할머니."


역시 네녀석이냐 카자미 유카.


'.......아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이외엔 말이 되지를 않지만.'


이 진성 S가, 라고 속으로 분노의 포효를 외치며 유카리는 겉으론 얌전하게 미소지었다.


"평온하답니다. 당신에게 받은 선물은 감사히 받았답니다."

"헤에. 그럼 잘 된 거구나. 다행이다~."


유카가 입에 손을 대고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가늘게 뜬 눈동자에는 이쪽에 대한 적의밖에 없다. 물론 유카리는 주눅들이지 않고 받아냈다.


'한 번 해 보시겠다 이거지 꽃의 요괴 주제에.'

'어머, 난 아무것도 잘못한 건 없는걸.'

'그럼 '수고했어 할망구!'는 뭔데.'

'틀리진 않았잖아, 할머니?'

'틀려먹은 게 맞잖아.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에게 거짓을 알려주다니.'

'음, 확실히 그게 칭찬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걸 잊어린 거 아냐?'

'뭔데?'

'만약 그게 거짓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환상향의 요괴 중에선 노인이라는 위치에 있고 경로의 날에 존경받는 존재라는 걸 이 애들이 인정했다는 것.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걸?'

'큭.......'


부딪히는 시선에 교차돼서 날아오는 열받는 말에 유카리가 작게 신음하자 유카는 상쾌하고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런 고로 항상 수고 많으십니다 할망구! 유카리 할멈?"

'이자식........!'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계속 지은 채 유카리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정도의 분노를 느낀 건 전에 있었던 하쿠레이 신사의 국지적인 대지진 소동 이래로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바로 유카와 유쾌하고 불유쾌한 유혈 낭자한 환상향 연무를 펼쳤었겠지만 여기서 싸웠다간 틀림없이 주변에 있는 어린 요괴들이 말려들겠지.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진정하자 유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환상향이 자랑하는 영원불멸의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 냉정하고 침착하게 애들을 보낸 뒤에 이 썩은 꽃을 틈새 저편의 마공공간에 처박아버리면 되니까.'


그렇게 유카리와 유카가 웃는 시선을 부딪히고 있을 때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유~카. 유~카."

"어머, 치르노. 어때, 대성공이었지?"

"응. 유카리 엄청 기뻐해줬어! 고마어 유~카."

"응응, 그치, 그치, 역시 경로의 날엔 나이든 분께 존경을 표해야지."


치르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카가 씨익 웃음을 보내 왔다. 아무래도 아직 유카리를 놀릴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글서 말야, 유~카."


하고 갑자기 치르노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왜 그러니."

"이 몸, 유~카에게도 줄 게 있어."

"응? 나에게?"


유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예상외의 사태인 것 같다. 곤혹스러워하는 그녀 앞에 치르노는 천천히 양 손을 펼치며 내밀었다. 그녀의 손 가운데를 보니 멋진 얼음 꽃이 피어 있었다. 놀라는 유카를 향해 얼음의 요정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할망구!"


공기가 얼어붙었다. 퍼펙트 프리즈였다. 역시, 냉기를 조종하는 정도의 능력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유카는 한동안 말없이 어안이 벙벙하게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물어보았다.


"이건 무슨 뜻이려나, 치르노."

"그거, 이 몸이 힘써 만든거야. 에헤헷. 이쁘지? 이 몸의 힘을 넣어서 특별한 얼음으로 만들었으니까 아마 태양 아래서도 1주일 정도는 괜찮을거야."

"그게 아니라! 에, 뭐야. 왜 나에게 '수고했어 할망구!'라고 한거야?"

"응? 그치만 유~카 할머니잖아."


치르노는 아무 주저나 죄악감 없이 딱 잘라 말했다. 그 한 순간에 유카의 왼손 주먹이 13번이나 치르노를 향해 날아갔지만 전부 틈새 사이로 손을 뻗은 유카리에 의해 막혔다.


'큭, 방해하지 마 할망구!'

'어머, 이 애가 말하는 걸 보니 당신도 할망구인걸?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는 게 어때?'


생각도 못했던 역전의 실마리를, 당연히 유카리는 놓치지 않았다.

아까의 울분을 풀기 위해 불쾌함이 느껴지는 비웃음을 유카를 향해 날렸다.

꽃의 요괴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냉정하게 치르노에게 질문했다.


"그래. 치르노에게 나는 할머니구나. 어째서니?"

"저기, 전에 다이쨩이."


치르노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뒤에서 일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대요정을 향해 무수한 꽃의 탄이 날아왔지만 그것도 유카리가 막아냈다.

이런 초고속 공방을 펼치는 둘을 보지 못한 채 얼음의 요정은 천연덕스럽게 계속한다.


"환상향연기라는 걸 제대로 읽어 봤는데 말야."

"아, 그 뭔가의 인간이 쓴 책?"

"응. 글서 그 안에서 유~카에 대해 적힌 게 있었어."

"뭐라고 적혔는데?"

"그게말야."


치르노가 열의있게 이야기한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로되, 긴 세월을 살아온 요괴는 점점 활동이 활발하지 않게 된다.

가로되, 카자미 유카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확인돼 온 요괴다.

가로되, 카자미 유카는 최근 그다지 꽃밭에서 움직이지 않는 듯 하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도 느긋하게 하고."


그렇게 끝맺은 치르노는 생긋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유~카는 할머니!"


그 한 순간에 유카가 펼친 공격은 주먹, 걷어차기, 양산으로 찌르기와 참격, 던지기와 박치기 등 실로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했다. 유카리는 그 모든 걸 틈새 너머로 넘겨 막아내고 완벽하게 치르노를 지켜냈다.


'후훗, 환상향이 자랑하는 영구불멸에 의한 유일무이의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를 얕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아무리 당신이 매섭게 몰아쳐도 분노가 실린 공격을 계산해 내는 건 엄청 쉬워.'

'큭, 틈새요괴 할망구가.......!'

'지껄여 보렴, 썩은꽃 요괴 할망구'


유카는 작게 혀를 차며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인 느낌을 주는 웃음을 지으며 치르노의 어께를 잡았다.


"치르노, 자~알 생각해 보렴. 정말로 내가 할머니니? 오히려 자연스럽게 젊은 쪽이라고 생각한다만."

"에엣, 그치만 몰골도 할머니 같은 걸."

"모, 몰골.......!?"

"응. 스커트가 질질 끌리는 점이라던가 양산을 양손으로 잡고 느긋이 걸어가며 인사한다던가. 왠지 인간 마을에 있는 인간의 할머니랑 닮았는걸."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유카에게 완벽한 결정타를 날린 뒤 치르노는 다시 웃으며 얼음꽃을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수고했어 할망구! 유~카도 꽃밭 지키니까 훌륭해! 그리고 환상향연기에도 최강 클래스라고 적혀 있었고. 이몸도 최강이니까 경의를 표할게."

".......그래. 고맙구나."

 

마침내 포기한 건지 유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음 꽃을 받아들였다. 그대로 박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행동을 할 기색은 보이지 않고 천천히 란에게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잠깐 이것 좀 맡아주지 않을래? 할 일이 생겨버려서 말야. 나중에 받으러 올게."

"네에."

 

란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그래도 정중하게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유카는 다시 유카리의 앞으로 돌아왔다.

둘은 한동안 무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잘 됐잖아. 평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존경을 받다니. 연중 꽃에 둘러싸여 묵직하게 어정어정 돌아다니고, 그러면서 어린이들이 주변에 있어준다니. 야~ 나이들었다는 거 참 대단한 이득인걸~, 유카 할머니?" 

"그러네. 매일 느긋하게, 정말 복 받았다니깐. 어딘가의 누구씨는 아직 늙은 몸을 채찍질하면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말이지~. 이런 걸 뭐라고 말했더라. 늙은이가 주책 부린다고 했던가? 아니, 죽으려 안달이라던가? 저기, 뭐였더라, 유카리 할머니?"

 

파직, 하는 소리가 나며 대기가 울리고 저택 전체가 덜컹덜컹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요정과 리글은 비명을 지르며 끌어안고 첸이 털을 거꾸로 세우고 미스티아는 다시 유서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때, 아직 이상함을 깨닫지 못하고 멍하게 있는 치르노와 루미아를 가로질러 한 명의 식신이 결사의 각오로 두 명의 대요괴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두분 다 부디 진정하세요."

"닥치고 있어."

"어디론가 가 있어."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말을 듣고 란은 반쯤 울며 몸을 뺐다. 하지만 마침내 첫 공격이 시작되려나 싶은 때에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아아, 마, 맞다! 얘들아, 거실 쪽으로 가서 간식을 가져올 건데, 먹고싶지 않니?"

"정말!?"

"먹을래~앳!"

 

제일 먼저 반응해서 앞다투어 방으로 뛰쳐 들어간 건 말할 것도 없이 치르노와 루미아였다. 한 템포 늦게 다른 사람들도 뒤를 이었다.

 

"와~아, 만세~"

"잘 먹겠습니다앗~"

"란 님의 간식은 끝내준다구~"

"기대되는걸~"

 

엄청나게 단조로운 국어책 읽기로 외치며 어린 요괴들이 마치 달아나는 토끼처럼 방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세 명만이 남은 뒤 란은 주뼛주뼛한 말투로 제안했다.

 

"저, 그, 두 분은 어떠신지요."

"필요 없단다."

"나중에 먹을 테니까, 내 몫은 남겨두도록 하렴, 란."

"어머, 나이에 맞지 않게 탐욕스럽구나 할망구."

"그쪽이야말로 나이가 들어서 먹는 양이 줄어든 거 아니니 할망구."

 

이미 싸움은 피할 수 없이 보여서 란은 한숨을 쉬며 어께를 늘어뜨린다. 그 때 탁탁탁 하고 발소리를 내며 치르노가 미닫이문 저편에서 얼굴을 내민다.

 

"저기, 왜 그래, 란? 다들 기다리고 있다구?"

"아, 으응, 미안하구나. 지금 갈게. 음.... 그건 그렇고 치르노?"

"왜 불러?"

"나, 나도 상당히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데 유카리님이랑 유카님처럼 존경받지 않으려나~ 싶어서."

"에~엣, 란은 아직 언니같은 느낌이잖아. 수고했어 할망구! 라는 말을 듣기엔 아직 너무 이르지 않아?"

"그, 그런 건가...."

"아하핫, 뭐야 그거. 루미아 흉내?"

"란, 나중에 두고 보자."

"그, 그런!"

"그리고, 치르노."

"왜?"

 

유카리는 유카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어께 너머로 치르노를 돌아보며 쓴웃음지었다.

 

"고마워. 아주 기뻤단다."

 

치르노가 멍하게 있다가 다시 태평하게 웃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감사는 이 몸이 하는 거라구!"

 

기세 좋게 머리를 숙였다.

 

"유카리, 항상 고마워! 앞으로도 힘내 줘!"

 

머리를 올린 치르노의 얼굴엔 매우 행복한 웃음이 넘치고 있었다.

그걸 지켜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가 작게 숨을 들이쉬고 유카리도 다시 웃었다.

 

"응. 물론이야. 힘낼게. 아직 힘낼 수 있어."

 

그렇게 치르노에게 끌려가듯이 란이 나가고 방에는 대요괴 두 명만이 남았다.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다가 유카리가 제안했다.

 

"장소, 옮기지 않겠어?"

"그거 좋은데."

"어머, 솔직한걸."

"어린 애들을 휘말리게 해서 엉엉 울게 만들면 흥이 깨져버리니까.:

"동감인걸."

 

큭큭 웃으며 공간에 커다란 틈새를 연 유카리는 슥 하고 표정을 지웠다.

 

"틈새 저편의 마공공간으로 가자고......"

"간만에, 폭발했어......."

 

격투는 밤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오셨다, 란 겁니까."

"무승부였어 무승부. 크로스 카운터 때문에."

"주먹다짐을 하셨던 겁니까."

"그 녀석, 야만스러운데다가 끈질기단 말야."

"능력은 쓰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즐기고 계셨던 겁니까."

"2할 정도는 말이지."

 

즉 8할은 진심이었단 말인가, 라며 란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어린 요괴들은 벌벌 떨면서도 간식은 제대로 챙겨 먹고 돌아갔고 첸도 자신의 주인의 거처로 돌아갔으므로 지금 이 방에는 유카리와 란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란은 유카리의 방 툇마루에서 너덜너덜해져 돌아온 주인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는 중이었다. 언제나 새하얗고 가녀린 두 팔에 생긴 무수한 베인 상처는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아파 보였다.

 

"그건 그렇고."

"뭐니."

"왜 저는 이런 걸 하고 있는 걸까요."

"어머, 나쁜 식신이네. 상처입은 주인을 그대로 방치해 둘 셈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유카리님이라면 이런 걸 하시지 않아도 옷 째로 재생시켜버릴 수도 있지 않나요."

"응, 그 말대로지만 말이지."

 

유카리는 후훗 하고 즐거운 듯이 웃었다.

 

"가끔은 이렇게 몸을 아끼지 않는 충실함에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가끔은?"

"응?"

"아, 별 말 아닙니다."

 

언제나 느릿느릿한 주인의 모습을 생각해 내자 왠지 석연치 않은 란이었다.

그런 식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카리는 '아' 하고 목소리를 내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건 그렇고, 할머니, 인가."

"아직도 신경쓰고 계셨던 겁니까."

"그거야 그렇지. 누가 뭐라 해도 환상향에서도 비교할 사람 없는 영원불멸이자 유일무이한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인 내가, 정말이지 노골적으로 할머니 취급을 받았는걸."

"......."

"왜 입을 다무는거야."

"딱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

 

주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온해 란은 놀란 나머지 손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니."

"아, 아닙니다. 그."

 

란은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했고, 주저하며 대답했다.

 

"........설마, 스스로 인정해 버리시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해서요."

"그치만, 봐."

 

유카리가 이상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 애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은 할머니인걸. 그렇게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계속 이 환상향에 있었어."

"결계가 뻗어나가 여기가 생겼을 때부터니 말이죠."

"그래. 강자, 약자, 인간, 요괴, 모두를 받아들여 주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환상향."

 

부드럽게, 마치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란. 난 말이지, 이 환상향이 너무 좋아."

"잘 알고 있습니다."

"바깥 세상의 인간의 세력에 밀려 존재조차 부정당해 버린 요괴들도 여기에선 건강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갈 수 있어. 그건 나도, 유카도 변하지 않아."

"그렇겠죠."

 

대답하면서, 란은 오늘 유카리가 선물받은 꽃들에 눈길을 주었다. 꽃은 몇 개인가의 꽃병에 나누어서 거실 곳곳에 장식돼 있었다. 유카리의 개인 방의 마루 위에도 한 병이 놓여 있다.

 

"........꽃말, 불멸이니 위엄이니 애정이니, 그런 것만 있었으니 말이에요. 애초에 치르노가 갖고 있었음에도 얼지 않은 걸 보면 특별하게 골라낸 꽃이었겠죠."

"꽃을 조종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 이란 말이지. 뭐,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상징과 같은 해바라기를 선물해 온 시점에서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매도하고 도발하고 주먹다짐까지 한 걸요."

"그거네, 츤데레라는 녀석."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외래어. 차가운 새침데기(츤)면서 부끄럼쟁이(데레)라는 거야."

"왠지 의미 자체는 알 것 같지만, 그런 말을 쓰시면 위엄이 없어지십니다."

"그건 그렇고 계절감이 전혀 없는 조합이네, 저 꽃들."

"그렇군요."

"후후, 시들지 않는 꽃이라, 마치 나 같은걸."

"........"

"왜 그러니."

"딱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이지, 너도 그 애들을 좀 보고 배워서 조금은 주인을 존경하는 게 어떠니"

"음, 즉 노인으로서 대우해 달라는 뜻입니까?"

"건방진 말은 하지 마렴."

"죄송합니다."

 

란은 작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유카리님."

"왜 불렀니."

"저는 웃지 않을 겁니다."

 

대화의 흐름상으로 보면 꽤 당돌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카리에겐 제대로 의미가 전달된 듯 하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란에겐 주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잠시 입을 다문 유카리가 살짝 눈 밑을 닦았으므로, 아, 역시, 하고 생각했다.

 

"기쁘셨던 겁니까."

"그러네. 기뻤었어."

 

유카리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의 관리와 수복, 환상향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일을 했지. 딱히 그 모든 게 환상향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해서 한 건 아니야. 오히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의 안녕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클지도 몰라."

"실제로 결계의 수족을 하는 것도 저구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지 말아 주세요."

"늙은이에게 채찍질이라도 하면서 일 시킬 셈이야?"

"자기 좋을 때만 그러시다니........"

 

란의 우는 소리에 작은 웃음 지으며 유카리는 길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환상향의 주민들에게 감사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일인걸. 결계를 만들어서 갖은 요괴들을 불러들이고,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이 쪽의 형편에 끌어맞추고........ 그거야 그걸로 도움받은 요괴도 몇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위해서 한 건 아니었는걸. 나는 다른 요괴를 이용해서 다른 요괴는 나를 이용해서. 그런 타산적이고 매마른 관계라고 생각했었어."

"과거형입니까."

"어느날 말이지."

 

유카리의 목소리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언젯적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쿠레이 대결계의 구축도 하기 전이었을까. 언제나처럼 틈새를 열어서 환상향의 여기저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말이지. 요괴 두 명이 앉아서 멍하게 앉아있는 거야."

"어떤 요괴였던 겁니까."

"글쌔. 기억나지 않아. 둘이 어디에 앉아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제대로 기억나는 건 두 사람의 몸에는 수많은 상흔이 있었다는 것 정도. '아, 이 녀석들 그다지 강하지는 않은 요괴고 인간에게 쉴 틈 없이 뒤쫓겨서 그대로 여기에 흘러 들어온 애들이구나' 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어. 그런 요괴는 이 환상향에서는 별로 특별한 존재도 아닌데 나는 왠지 그 둘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어."

"어째서 인가요?"

"어째서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쭉, 조용히 앉아있는 두 사람이 묘하게 신경쓰였거든. 뭘 하고 있는 걸까, 싶어서. 이상하게도 바로 내려갈 기분은 들지 않았었어."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가끔 새나 벌래가 우는 소리가 울렸다. 포근한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화창한 풍경 속에서 둘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카리도 가만히, 그저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둘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구나.

 

다른 한 쪽이 대답했다.

 

-그러네

 

툭 툭 내뱉듯 말을 주고받는다.

 

-인간, 없구만.

-있겠지. 수가 적을 뿐이고.

-많지 않으면 딱히 무섭지는 않겠어.

-그러네.

-언제 이후로였지.

-뭐가.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게.

-글쌔. 하지만 꽤 오랜만인 것 같아.

-여기라면 여유롭게 있어도 되겠지.

-그런 것 같아.

-돌도 날아오지 않고 칼에 베일 걱정도 없어.

-술법에 불타거나 식신으로 부추겨질 일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구나.

 

그리고 마지막에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와서 다행이야.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야."

 

유카리가 그렇게 마무리짓고 어딘가 낯간지러운 듯 한 한숨을 자아냈다.

 

"그래도 말야,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걸 보고 나서 왠지 그, 가슴이 벅차올라서 말야. 아,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었지만 난 생각보다 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유카리의 목소리는 매우 즐거운 듯이 들렸다. 란은 잠시 먼 과거를 생각했다. 확실히 옛날의 유카리는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게으른 건 바뀌지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지루함에 젖은 듯 보였고 그렇다고 해서 뭔가 재밌는 걸 하는 것도 없이 그저 마냥 차가운 인상 밖에 없었던,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은 이미 희미해져 버린 기억이지만."

 

"그 때부터 조금씩 환상향을 보는 눈이 바뀌기 시작했어. 눈이랄까, 마음이 바뀐 걸지도 몰라. 무엇을 보더라도 즐겁게 생각되기 시작했어. 요정이 의미 없이 떠들어대는 것도, 요괴가 지루함에 지쳐 싸움을 하는 것도, 인간이 변하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도. 전부 내 안에서 의미를 갖고 환상향의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됐어."

 

열띤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조용하게 이야기를 한 뒤 유카리는 다시 크게 숨을 쉬었다.

 

"그래도 근본적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환상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로 감사받을 것도 없어. 그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그런데 말야."

 

유카리가 작게 코를 훌쩍였다.

 

"그런, 행복해 보이는 웃는 얼굴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들어버리면 말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웃지 않을테니까요."

"고마워."

 

유카리가 한동안 말 없이 눈 한쪽을 누르고 있었으므로, 란도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주인의 어께에 손을 올렸다.

유카리는 이윽고 손을 놓고 '아~' 하며 어딘가 부끄러운 듯 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 오늘은 전혀 나답지 못했는걸."

"그러네요. 하지만 가끔은 이런 날이 있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네.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저도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고 보니 유카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누군가에게 하신 건 확실히 드문 일이네요."

"경로의 날이니까.  평소에도 늙은 몸을 이끌고 일하는 너에게 공경을 표한 것 뿐이야."

"저는 아직 '언니' 라는 듯 하지만요."

"요정과 주인의 말, 어느 쪽을 신용할래."

"저의 주인은 모두에게 수상하다는 말을 듣는 분이신걸요."

"무엇보다 그거, 그거야! 왜 환상향 안에서도 견줄 사람 없는 영구불멸에 유일무이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인 내가 할머니고 그 옆에 있는 늙은 여우에 식신까지 딸린 네가 언니인건데?"

"길어요..... 그것보다 비교한다고는 해도 자기 식신을 거기까지 깎아내리시나요, 보통."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 그것보다 질문에 대답이나 하렴."

"음, 아마도 그거에요. 저 같은 건 아직 유카리님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 한 표."

"언제부터 그렇게 입을 잘 놀리게 됐을까나."

"좋은 본보기가 가까이에 있어서 말이죠."

"변명만 잔뜩 늘어놓고 말야."

 

유카리는 쓴웃음을 지은 뒤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럼, 이제 슬슬 자도록 할까. 란, 이불 준비 잘 부탁해."

"엣, 공경해 주시는 게 아니셨나요?" 

"어머, 너는 '언니'잖니."

"정말 자기 좋을 대로만 쓰시는군요."

"아무래도 좋으니까 어서 하렴. 너무 졸려서 참을 수가 없단 말야."

"평소라면 일어나 계실 시간입니다만."

"오늘은 나답지 않게 낮부터 일어나 있었고 여러가지로 지치기도 했단 말야. 내일 밤까지 자고 싶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오래 자잖아요. 겨울도 아닌데."

 

란이 기막혀 하자 "그치만" 하고 유카리는 짓궂게 미소지었다.

 

"조만간 아직 낮인데도 일어나야 할 때가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

"어째서인가요."

"그 애들은 다시 올 테니까, 야."

 

유카리는 그것이 기대돼서 견딜 수 없다는 듯 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백택 교사가, 아니면 아큐가. 어쩌면 오늘 일로 죄책감을 안게 된 대요정에게서 이번 일의 진상을 배워서 말야. 착한 아이들인걸. 분명 울면서 사과하러 올 거야."

 

유카리의 웃음은 수상했다. 란은 작게 한 숨을 쉬며 일단 부탁해 보았다.

 

"너무 심한 벌은 주지 않도록 해 주세요. 악의는 없었으니까요."

"아니야. 여기선 틈새로 끌고 가서 잔뜩 벌을 주어야겠어."

"기쁘지 않았습니까."

"그거랑 이건 이야기가 달라. 환상향 안에서 견줄 사람 없고 영원불멸에 유일무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고로부터 극에 달한 이과계 아가씨같은 미소녀인 이 나의 작은 새처럼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상처입힌 그 죄, 단숨에 지옥으로 가야 될 정도로 무겁다구!"

"그러십니까."

"후후후. 이제부터 잔뜩 수면을 취해서 체력을 비축해놓은 뒤에 아침부터 밤까지 틈새에서 설교를 해 주겠어."

 

왠지 모를 두려운 냄새가 나는 수상한 웃음을 짓는 주인을 보며 "아아, 완벽하게 원래의 모습이구나." 라며 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첸, 강하게 살아가렴.'

 

마음 속에서 자신의 식을 부르며 란은 주인의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불을 펼치며 슬쩍 보니 유카리는 아직 틈새 너머로 어딘가를 엿보고 있었다. 툇마루에서 내려오는 발이 흔들흔들 하는 뒷모습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수고했어 할망구! 입니다.'

 

실제로 말했다간 엄청나게 화를 낼 걸 알고 있었기에 란은 마음 속으로만 읊조렸다.

 

'내 주인은 행복하신 분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란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3일 후, 예상대로 치르노와 첸이 울면서 사과를 하러 왔다.

유카리는 말 없이 그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웃으며 안아주는 것으로 용서해 주었다.

 

 

 

 

 

 

<끝>

 

 

 

 

 

 

 

 

 

 

 

 

 

 

 

 

 

 

 

 

 

 

작가 후기

 

(창상화에서의) 첫 투고입니다. 1000점 정도는 받았으면 좋겠네요.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경로의 날에 맞춰서 써 보았습니다.

유카리는 왠지 사랑하는 환상향을 지키기 위해서 속으로 고민할 것 같은 이미지.

 

어찌 됐든, 수고했어 할망구!

 

 

 

 

 

 

 

 

역자후기(역자 M_Lumius)

 

번역을 못한 지 어언 1년이 넘었습니다.

군대에 들어온 뒤로 일본어는 거의 접하지도 못했고 그래서인지 한자도 많이 까먹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33.04KB의 용량밖에 되지 않는 작품 하나는 전에 비해서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더군요.

자연스러운 번역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재활치료같은 느낌으로 번역한 글이라 딱딱할 수도 있고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라던가 aho씨 본인의 필력을 그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죄책감까지.......


제가 aho 씨의 작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aho 씨는 기본적으로는 저희를 웃음짓게 만들지만 웃는 그 얼굴 그대로 웃음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바꾸어 버리는 그 필력에 반해서입니다.

이야기를 전개하고 연출해내는 능력이랄까.

마냥 웃을 수도 없고 쓴 맛을 느껴 침을 뱉자니 작가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어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결국 쓴 맛과 단 맛을 모두 느끼게 되죠.


질긴 순대가 들어간 순대국을 먹는 느낌일까요.


맛좋은 순대가 들어가 있고 냄새도 맛있고 실제로도 맛있는데 먹기 위해선 질긴 이 겉껍질을 어떻게든 소화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씹으면 씹을 수록 고소한 맛까지 느껴져서 껍질마저 싫지 않게 됩니다. 게다가 씹는 느낌까지 좋아지죠.

이게 aho 씨의 매력이 아닐까 싶네요.



아무튼 aho씨의 허락을 받아낸 이상 끝까지 한 번 해 볼까 합니다.

좋은 건 혼자 읽으면 재미 없잖아요.

같이 즐겨야죠.

물론 정당한 범위 내에서면 더욱 좋겠죠.


aho씨의 부탁으로 작가명(aho)과 출처를 맨 위에 표기했습니다.


영 좋지 못한 번역이었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번역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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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전Lum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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