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번역물은 동방창상화의 aho 작가의 작품을 작가의 허락을 받아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글의 저작권은 aho 님에게 있으며 상업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줄 간격은 원작의 줄 간격에 맞춰 띄우고 있으므로 조금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전Lumius-

원작 URL - http://coolier.sytes.net/sosowa/ssw_l/60/1223659216

 

 

원작 투고 시기 - 2008년 9월 21일

 

 

 

어디까지나 저만의 설정을 내질러버리는 느낌으로 쓴 사이드 스토리입니다. 읽으실 때 주의해주세요.

-by.원작자 aho






눈을 뜨자 시야 가득히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신사, 도둑맞았나?'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딴죽을 걸며 하쿠레이 레이무는 느긋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여긴 어디려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음, 사람 마을 근처의 길가, 려나?'

 

그렇게 생각하고서 레이무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위화감이 있다.

 

'아, 그런가. 산이 푸르구나.'

 

분명, 어제까지 계절은 가을이었다. 요괴의 산에 가서 아키 자매 중의 한 사람과 탄막승부를 벌여 압승한 뒤, 보수로 강탈한 군고구마를 마리사와 같이 배불리 먹고, 그 뒤로 싸구려 소주로 밤을 새우며 바보같은 이야기로 불타올랐고.

 

'그럼, 그 뒤로 어떻게 된 걸까? 전혀 기억이 안나네......'

 

 그렇다면 술에 취해서 거의 의식도 없는 상태로 여기까지 걸어왔던가, 혹은 날아왔다는 건가. 흐음.

그렇게 끙끙거리며 생각해내려 했지만 역시 어젯밤의 일이라곤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나'

 

레이무는 생각하기를 깨끗이 포기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머리를 굴려 보아도 별 수 없어. 될 대로 되라지, 란 식으로 평소처럼 생각했다.

 

'그런 것 보다, 왜 산이 푸르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까진 가을이었을 테고....... 이변, 인가?'

 

기온을 생각해 보면 계절은 초여름 정도일까. 시원하진 않지만 여름을 넘긴 건 아니었다. 누군가, 강한 힘을 가진 요괴가 계절을 가을에서 여름으로 바꾸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바꿀 거라면 봄으로 하란 말야. 그러면 꽃놀이라도 하면서 마음껏 마셔줄텐데.'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레이무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저쪽에 이변의 원인이 있다'는 것 같은,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이변이,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고 레이무는 떨떠름하면서도 인정했다. 자신의 무녀로서의 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믿고있는 것이다.

 

"그치만.... 이변이 아니라면 왜 어제까진 가을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 되어 버린걸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레이무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 누가 탄막놀이를 하고 있는데?'

 

탄을 주고받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므로, 레이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뭐야 저게? 어린애......?'

 

하 늘을 날며 탄막을 전개하고 있던 건 양쪽 다 인간 여자아이었다. 사람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요괴, 가 아니다. 이것도 무녀로서의 감이었지만, 요괴는 만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 번 보면 "아, 이녀석 요괴구만" 하고 왠지 모르게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 레이무의 눈앞에서 하늘을 날며 서로 탄막을 쏘아대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인간 여자아이었다. 둘 다 앳된 모습으로 진지하게 탄을 쏘아대며, 사이사이로 피하고, 나아가선 스펠 카드까지 발동시켰다.

너무나 황당한 광경에 레이무는 멍하게 입을 쩍 벌린 그대로 서서 굳어버렸다.

 

(케이네가 서당 아이들에게 탄막놀이의 실습이라도 시키고 있는 걸까?)

 

수십초 정도를 생각하고 나서 도출해낸 결론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시킬 이유도 알 수 없고, 일단 영력이니 마력이니 하는 잘 모르는 힘을 이용해서 탄을 만들어 내는 게 탄막놀이인 만큼, 인간 아이에 저 정도 나이는  명백히 이상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혼 란스러워 하는 레이무의 앞에서 한 여자아이가 상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작은 몸이 엄청나게 날아가며 그녀가 전개했던 탄막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위험햇!" 하고 무심코 말한 레이무의 앞에, 그러나 여자아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듯 한 몸놀림으로 훌륭한 공중제비를 돌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아~ 또 져버렸어~"

"헤헷, 이걸로 내 5연승이네."

"치잇! 두고 봐! 다음엔 무조건 이겨 줄테니까~!"

 

나중에 내려온 이긴 여자애와 진 쪽의 여자애가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 다 아까까지 보이던 진지한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이다.

눈 앞의 둘의 모습에 왠지 자신과 마리사를 떠올리며, 레이무는 살짝 웃었다.

 

'음..... 그건 그렇고.'

 

레이무는 턱에 손가락을 대고 아까의 탄막놀이를 떠올렸다. 둘 다 다소 서투르기는 했지만 꽤 아름다운 탄막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회피하는 것도 나름 잘 하는 편이었고, 아마 루미아 정도라면 호각으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어린 애들 치곤 대단한걸. 어디, 스펠 카드 룰 창시자로서 격려라도 한 마디 해 줄까.'

 

왠일로 그런 기분이 든 것도,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이 자신과 마리사의 모습에 겹쳐졌기 때문이겠지. 레이무는 기분 좋게 말을 걸었다.

 

"얘, 너희들!"

"응?"

"왜요?"

 

아까의 네 탄막은 어쩌구 어쩌구 이야기하던 두 사람이 같이 돌아보았다. 왜 저렇게 놀라는 걸까, 조금은 의문이 들면서도 기분이 한껏 좋아진 레이무는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까 겨루는 걸 봤는데, 어린 애들이 꽤 좋은 탄막을 쓰는구나. 칭찬해줄게."

"에, 그"

"감사합니다."

 

이쪽이 모처럼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었는데도 상관없이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으로 무서운 듯 서로를 껴안았다.

이런 대응을 보이면 아무래도 기분은 좋지 않다. 레이무는 뺨을 경직시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왜 그러는 걸까~? 뭔가, 마치 수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 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그, 그거야"

"언니의, 그 옷........"

"옷?"

 

듣고 나서 레이무는 자신의 복장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처럼 조금 특수한 디자인의 무녀복이다.

이 옷이 뭐라도 되는지 물어보려다가 레이무는 말문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요괴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버리는 것 때문에 '하쿠레이 신사는 요괴에게 넘어갔다!' 라는 소문도 있긴 있었지. 그러면 나도 당연히 요괴취급을 받겠고.'

 

어쩌면 이 여자애들은 '나쁜 짓을 하면 무녀가 잡아먹으러 온다' 던가, 그런 걸로 부모에게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망할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녀석은 무조건 날려버리겠어, 하고 속으로 강하게 다짐하며 레이무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니, 걱정 안해도 괜찮단다. 나는 좋은 무녀니까."

"좋은 무녀?"

"그래 맞아. 어디보자, 저쪽에 하쿠레이 신사라고 알고 있니?"

 

신사 쪽을 가리키자 두 여자애는 얼굴을 마주보며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를 무서워하는 모습이었다.

레이무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느 거기 무녀를 하고 있거든."

"엣? 하쿠레이의 무녀?"

"언니가?"

"그래 그래 그거 그거. 내가 하쿠레이의 무녀야."

 

레이무가 없는 가슴을 펴고 말하자 여자아이들은 얼굴을 맞댔다.

그리고, 이번엔 왜인지 엄청나게 화난 얼굴로,

 

"거짓말쟁이!"

"뭐엇!?"

 

레이무는 당황했다.

 

"아니, 잠깐, 거짓말쟁이라니 무슨 소리야!?"

"거짓말쟁이 맞잖아. 그런 가짜 옷까지 입고 말야!"

"언니가 하쿠레이의 무녀님일 리가 없잖아!"

"우와. '하쿠레이의 무녀님'이라니, 요즘 애들은 교육이 잘 되어있네...... 가 아니라! 내, 내가 하쿠레이의 무녀일 리가 없다니....."

"그야 다른 걸. 그치?"

"응. 언니는 무녀님이랑은 전혀 달라."

"어디가?"

"전부"

"가짜다. 가짜 무녀야."

"이, 이 꼬맹이들이...........!"

 

레이무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차라리 정의의 주먹을 구경시켜 줄까, 생각하다가 아니, 잠깐, 기다려, 하고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화를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레이무. 어린애 상대로 이런 짓을 했다간 또 유카리같은 애들이 '아아~~ 이 어어얼~~~마나 끄으으읕~~~내주는 멍청이일까요~~~' 라던가 말할 게 틀림없어! 진정하자, 진장하자구.......!'

 

스읍, 하아. 심호흡을 한 뒤 레이무는 어떻게든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역시 하쿠레이의 무녀야. 아무렇지도 않다구! 속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물어보겠는데,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쿠레이의 무녀는, 이름이 뭐야?"

"무녀님의 이름?"

"그런 거 당연하잖아."

 

두 사람은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 입을 모았다.

 

"하쿠레이 레이무!"

"그것 봐! 하쿠레이 레이무는 내 이름인걸!"

 

득의양양하게 여자애들을 손가락질하자 아이들도 지지 않고 대들어왔다.

 

"거짓말이야!"

"역시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에 이상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대체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그야 언니, 우리가 알고 있는 무녀님이랑은 전혀 다른걸!"

"어디가 다르다는 건데?"

"무녀님은 그렇게 머리 나빠보이지 않아."

"그렇게 가난해 보이지도 않아."

 

좋았어 결정. 이녀석들 날려버린다.

레이무가 뼈마디소리를 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께를 두드렸다.

 

"자자, 진정하세요.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어린애가 하는 말이잖아요."

"뭐야.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오는 말이라고 막 하지 말란 말야........ 꺅!"

 

뒤를 돌아본 순간, 레이무는 엄청나게 큰 비명을 질렀다.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 곳에 서 있던 건...... 아마도 서 있을 것 같이 생긴 물체는, 한 마디로 말하면 눈알의 산이었다. 질퍽질퍽한 녹색의 진흙 덩어리 같은 물체에 천 개는 되어보이는 눈알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입이라고 생각되는 숨구명같이 생긴 것도 다섯 군데나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굵고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괴라면 질릴 정도로 보아온 레이무에게도 충격적인 요물의 등장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온몸을 부들부들 흔들며 그 물체가 수많은 눈알을 한 번에 깜빡였다. 이상한 게 없는지 확인한 후 안도하는 한숨이 다섯 개 정도의 입에서 '후우.' 하고 흘러나왔다.

 

"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요. 놀래키지 말아 주세요."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드디어 쇼크에서 해방된 레이무는 노성을 질렀다. 눈앞의 물체의 눈알 전부가 전부 같은 타이밍에 깜빡이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다. 우와아, 기분나빠, 하고 생각하며 레이무는 조심스래 질문했다.

 

"당신 뭐야. 대체 뭐야. 에, 뭐냐, 새로운 종류의 요괴?"

"요괴요? 하하하, 농담도."

 

그 대답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다.

 

"그치? 당신같이 영문을 모르게 생긴 요괴가 있을 리는 없지........"

"저는 발큐리앗쵸 벨리그릭시아 성인과 인간의 혼혈이고, 요괴와는 또 다른 존재랍니다."

 

말하자면 요괴보다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체 같다. 레이무는 탈력해서 그대로 그 자리를 떠버리고 싶은 와중에 일단 계속해서 질문했다.

 

"저기 말야.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뭘 말인가요?"

"여기 말야, 환상항이 틀림없는 거지?"

"네. 틀림없습니다만."

".......그리고 당신은 뭐였지?"

"발큐리앗쵸 벨리그릭시아 성인과 인간의 혼혈이랍니다. 인간의 마을에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고 있어요."

"헤에~ 그렇구나........ 라니, 인간 마을의 교사?"

 

싫은 예감이 든다, 고 생각한 순간에 레이무의 곁을 아까의 여자애 둘이 지나가며 함께 눈알의 산에 안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입을 모아 한 말은,

 

"케이네 선생님~!"

 

죽을까보냐 생각했다. 죽을까 생각했다.

 

"이젠 싫어어어어어엇!"

 

레이무는 비명을 지르며 그곳에서 도주했다.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날아가는 것도 잊고 달리는 걸 몇십분. 정신을 차려 보니 레이무는 다시 본 기억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 여기, 유카리네 집 근처네.'

 

길을 더듬으며 달려온 곳이라서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골랐다.

여러가지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머리 나사라도 풀릴 것 같았다.

 

'일어나 보니 가을에서 여름이 됐단 말야? 인간 애들이 탄막놀이를? 내가 아닌 사람이 하쿠레이의 무녀? 케이네가 케이네가 아닌 무언가의 외계인이라는 눈알덩어리 괴물?

 

영문도 모르겠거니와 생각해 봐도 이해불가. 레이무는 그곳에서 고개를 휙휙 내저은 뒤 눈을 치켜뜨고 결론을 내렸다.

 

" 이변이야. 이건 틀림없이 이변이야. 내 감은 여전히 반응이 없지만 이게 이변이 아닐까보냐. 그리고 범인은 아마 유카리! 이런 이상한 일을 할 녀석은 그 녀석밖에 없어! 즉, 유카리를 때려눕히면 만사 해결이라는 걸로 결정! 그런 고로 정신이 이상해지기 전에 유카리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어. 정말이지."

 

레이무는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여전히 날아가는 것도 잊고 유카리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앗! 이상한 녀석 발견!"

 

우와아, 또 뭔가 왔다.

레이무는 울 것 같으면서도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상공에 작은 사람의 모습이 떠 있었다. 붉은 색을 기본으로 한 법의같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로, 머리 양쪽 위에는 고양이같은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후후후, 우리들 야쿠모 일가의 본거지에 당당히 잠입하려 하다니, 바보같은 녀석! 여기서부터는 한 발자국도 더 갈 수 없어! 뭐, 뭘 하는거야!?"

 

레이무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올랐기 때문에 여자애의 대사는 도중에 비명으로 끊어졌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가까워졌고, 접근해온 건 물론 레이무다.

 

"뭐, 뭐야, 뭐하는거야."

 

기세에 눌린 듯 반쯤 울며 몸을 뒤로 뺀 그 여자애를, 레이무는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선 있는 힘껏 껴안았다.

 

"다행이다~앗!"

"푸헥!? 잠깐, 뭘 하는거야! 그만둬, 납작한 가슴으로 끌어안지 마!

 

레이무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여자애를 요괴 체면이 무색해질 정도의 힘으로 끌어안으며, 우는 그대로 뺨을 비볐다.

 

"살았다, 진짜 다행이야.......! 내가 아는 의미의 요괴같은 요괴가 제대로 존재하고 있었어......!"

"으엑, 그만둬, 기분나빠, 저리 가."

 

진짜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애를 수십초간 잔뜩 끌어안고 뺨을 부빈 뒤, 레이무는 휙 하고 떨어져 나왔다. 여자애는 급히 레이무에게서 거리를 둔 뒤 주섬주섬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다시 자신만만한 웃음을 띄웠다.

 

"후, 후후훗. 처음 만나자마자 묘한 공격을 해 오잖아. 하지만 이 도도메를 얕보지 말란 말야. 이런 이상한 공격으론 쓰러지지 않는다구!"

"아니, 딱히 공격은........ 그것보다, 도도메가 뭐야?"

"내 이름! 훗, 나를 동요하게 만든 너에겐 특별히 가르쳐 주지. 이몸이야말로"

 

스읍,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야쿠모유카리님의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  야쿠모 도도메 님이시다앗!"

 

파앙, 하는 파공성이라도 들릴 기세로 자기를 엄지로 가리켰다.

레이무는 뒷머리를 긁적인 뒤,

 

"헤~에~ 그런거구나아~"

"반응이 약해!?"

"뭐, 딱 좋네. 네가 야쿠모 가의 식이라면 유카리네 집으로  안내 좀 해줘. 내가 아는 곳이랑 장소가 달라서 곤란하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가 아니라!"

"오, 역시 말단. 부려먹히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걸."

"말단이라고 하지 마! 그, 그것보다, 다, 당신 지금, 야쿠모유카리소녀님을 막 불렀겠다.......!"

 

 두려움에 떠는 여자애에게, "그게 뭐" 라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뒤, 레이무는 손바닥을 쳤다.


"아, 그런가. 도도메란 건 도도메색(체리색=버찌색)을 말하는 거구나. 유카리(보라색), 란(짙은 파랑색), 첸(귤색), 이런 식으로 색을 붙여서 야쿠모 일가의 이름을 통일했구나."

"그런 건 상식이잖아..... 것보다, 다, 당신, 유카리 소녀님 뿐 아니라 란 소녀님까지 막 부르다니."

"저기 말야, 아까부터 그 '소녀님' 이란 게 대체 뭐야. 여러가지 의미로 양심없는 말 같은데."

"뭐어? '소녀'는 야쿠모의 일원들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의 호칭인게 당연..... 뭐야 당신, 그런 것도 모르는거야?"


풋, 하고 웃는 도도메에게 레이무는 가볍게 살의를 느꼈다. 고양이귀 소녀는 득의양양하게 따라오라고 하며 유카리네 집으로 가는 길로 앞장서서 레이무를 인도했다.


"보도록 해. 이게 야쿠모가의 위대한 창시자, 야쿠모 유카리 소녀님이야!"


하고 도도메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낯익은 사람의 석상이 하나 있었다. 받침대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는,


───야쿠모 가의 창시자이자 환상향의 수호자, '영원의 소녀' 야쿠모 유카리 상


일단 몽상봉인으로 박살냈다.


"뭣! 무, 무슨 짓을!"

"못 참아! 뭐가 '소녀'라는 거야, 정말이지. 그 녀석 같은 건 야쿠모 유카리 '할망구'가 딱이라구."

"이, 이녀석, 야쿠모가를 물로 봤겠다! 더이상 용서하지 않겠어, 싸우자!"

"그래 그래."


흥분해서 스펠카드를 꺼내는 도도메에 비해, 레이무 쪽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도도메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레이무는 필사적으로 내쏟는 빈틈투성이의 탄막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쏙쏙 빠져나갔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서 탄을 잔뜩 뿌리자 고작 수십초 정도만에 고양이귀 소녀는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자, 내가 이겼어. 엉성한 탄막이었는걸."

"그, 그런. 이렇게 간단하게.......!?"

"것보다 의미없는 운동 좀 시키지 말아 주겠어? 이쪽은 영문을 모를 일만 일어나서 지쳐 있단 말야."


엉망이 된 도도메를 앞에 두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양이귀 소녀는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어께를 떨며 신음했지만, 이윽고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같은 그 반응에, 레이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잠깐, 탄막놀이에서 진 정도로 그렇게 울지 마."

"그치만, 적어도 결계의 수호자인 야쿠모의 일원이 이런 머리나빠보이는 녀석에게 졌다니."

"좋아, 알겠어, 마음껏 울어."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프다고오! 귀 잡아당기지 맛! 소녀님 살려줘요!"


그렇게 레이무가 성에 찰 때까지 고양이귀 소녀를 괴롭히고 있자, 갑자기 말이 걸려왔다.


"우리 집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는 게 당신입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의, 명석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지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없었지만, 왠지 귀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


무심코 도도메의 귀에서 손을 놓고, 레이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소녀님~!" 하고, 도도메가 울면서 달려간 그곳에는, 키가 큰 여성이 서 있었다.

도도메보다 장식이 훨씬 많은 법의를 입고,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머리 양쪽에 튀어나온듯 한 고양이의 것 같은 귀에, 조금 드세어보이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수 갈래로 갈라진 고양이의 꼬리가 인상적인 요괴다.

겉으로 보기엔 관록이 있어 보이지만, 전신에서 나오는 기척은 대요괴의 것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짜부라드는 듯 한,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고 있었따.

물론, 본 기억은 없다. 없었을 테지만.


'이 요괴, 설마.....'


울며 안겨드는 도도메를 달래면서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요괴 앞에서 레이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래 말을 걸었다.


"저기, 당신 혹시 첸이야?"

"엣?"


여자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쪽을 본 뒤, 엄청나게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도도메에게서 몸을 뺀 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

그 리고,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가까이서 보자, 여자의 영리해 보이는 모습에는 역시 야쿠모의 식의 식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가 인간 여자처럼 성장했다면 분명 이런 모습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미모였다.

아마도 첸이라 생각한 여자는, 레이무보다도 더욱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무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떨리는 입술로 망연하게 불러왔다.


"설마, 하쿠레이 레이무 씨, 인가요?" 

"그래."

"정말로, 레이무씨인가요?"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하고 있잖아."

"하지만....... 아아, 그런가. 오늘이 그날이었던 거로군요......!"

"엥? 무슨 말이야."

"레이무 씨~잇!"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첸이 뛰어들어왔다. "위험햇" 하면서 레이무는 옆으로 피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지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얼굴부터 땅에 갖다박으며 "푸헥" 하고 이미지가 망가지는 비명을 질렀다.


"어, 어째서 피하신 겁니까!?"

"당연하잖아! 너같이 덩치 큰 여자가 뛰어들면 난 짜부라든다구!"

"덩치가 크다니......."


더러워진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걸어온 첸은 레이무의 바로 앞까지 와서 "아, 정말이다" 며 얼굴을 폈다.


"이젠 제 쪽이 더 크군요."

"그런 것 같네....... 그렇다는 건 역시 당신, 첸이구나."

"네, 맞아요. 야쿠모 유카리님의 식의 식, 야쿠모 첸이에요."


헤에~, 거리며 레이무의 기억 속의 첸과 같은 모습으로 웃는 고양이녀의 코에서 주륵, 한줄기 코피가 흘렀다.

너무나도 무방비한 데다가 호의로 넘치는 표정에 레이무는 당황했다.


'아까도 껴안으려고 했었고....... 나, 이 녀석에게 그렇게 사랑받고 있었나?'


그것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레이무가 돌아보자 고양이귀 소녀 도도메가 아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당신, 대체 뭐야?"

"글쌔, 대체 누굴까."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야쿠모 유카리의 저택 안은 레이무의 기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안내는 필요 없다, 고 말하긴 했지만 첸은 무조건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듣지 않았다.


"그야, 레이무 씨하고 만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인걸요. 여러가지로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에요."


레이무의 옆에 서서 긴 복도를 걸으며 첸이 살며시 미소지었다. 레이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기 말야, 그 레이무 '씨' 라고 부르는 거 그만두면 안돼? 아무래도 위화감이 있는데."

"아, 죄송합니다. 그런가, 레이무 씨가 그정도의 나이였었고, 애초에 그다지 대화도 나누어 본 적이 없었네요, 저희들."


그리워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는 첸의 옆모습을 보며, 레이무는 잊고 있었던 중요한 질문을 기억해냈다.


"그래, 맞아. 그거야 그거. 네 말투로 봤을 때....... 랄까, 겉모습으로 보기에도 명확한데, 이 환상향은 아무래도 미래의 환상향 같은걸."

"미래..... 그렇군요. 레이무 씨가 보면 그렇게 되는군요."

"구체적으로, 지금이 언제야?"

"그러네요...... 레이무 씨, 당신 입장에서 보면 오늘은 언제인가요?"

"어디....."


레이무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오늘이라고 생각하는 날짜를 말했다. 그러자 첸은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마침 12080년 후의 미래입니다."

"흐음 만 이처............ 에에에에에에에에엑!?"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야쿠모 저택에 레이무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엄청나게 당황하는 그녀의 추태를, 첸은 눈을 살며시 뜨고 부드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놀라게 했나요."

"당연하잖아! 고작해야 100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1만 2천년이라니, 당신."


100년이라고 한 건 미래의 세계로 상상할 수 있는 한계가 겨우 그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1만 2천년이 되면, 이건 이해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선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될 때 까지 네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만. 아무리 요괴라곤 해도."

"후후, 저 뿐 아니라 레이무 씨의 지인은 대부분 살아 있답니다."

"정말로!?"

"네에. 다들, 강한 요괴들이니까요."

"그, 그렇구나......."


왜일까 레이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카리나 스이카는 어쨌든, 자기 주변에 있던 대부분의 유쾌한 요괴들의 모습을 떠올리자 도저히 대요괴로 성장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끙끙대는 무녀를 보며 쿡쿡 웃은 뒤, 첸은 조금 슬프게 눈을 떨었다.


"그렇다곤 해도, 인간이었던 분들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거야 그렇겠지....... 그렇다는 건, 아, 그런가."


갑자기 어떤 사실을 깨닫고 레이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차" 싶어 머리를 긁었다.


"그럼, 역시, 마리사는 죽은 거네?"

"네?, 아, 네, 그렇군요."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런가. 그렇지. 당연한 거겠지. 응, 이런 건, 아무렇지도."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레이무는 우물우물거렸다. 말하자면, 질긴 인연의 친구는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살다가 죽었다는 거다. 사충의 마법(불로불사의 마법)이란 걸 써서 마법사라는 종족 자체가 되지는 않았던 듯 싶다.

마리사답다며 웃어야 하는지, 살아있어 줬으면 했다고 울어야 할지, 레이무는 알 수 없었다.

거기서 문득,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첸을 보았다.


"왜 그래?"

"아, 아니요..... 분명, 마리사 씨가 여기 있었다면 엄청나게 기뻐했겠지, 싶어서."

"응..... 뭐, 그 녀석이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무지막지하게 오랜만의 재회가 될 테고 말야. 나에겐 어제 같이 술이나 마시며 취하던 녀석이었지만."

"그건, 정말로 레이무 씨 답네요."


첸이 입가에 손을 대고 기품있게 웃었다. 그 움직임에 소매에 꿰매어진 수많은 방울들이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뭔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걸. 그거, 당신 취향이야?"


금색 실로 장식된 수많은 술 하며 진한 색의 띠가 엄청나게 많이 붙은 법의를 보고 말하자 첸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요, 딱히 제 취향은 아니고........ 야쿠모 가도 꽤 커져버려서 각자의 지위를 알기 쉽도록 복장에 차이를 둬 달리고 밑의 아이들에게 부탁받아서요."


아까 밖에서 만난 고양이귀 소녀가 "식의 식의 식의 식의 식의......"라던가를 말한 걸 레이무는 떠올렸다.


"과연, 그럼 당신은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거군."

"일단, 유카리 님과 란 님 바로 다음으로, 야쿠모 가에선 서열 3위의 지위에 있으니까요. 두분께 비하면 아직 부족한 몸이라 부끄럽지만요."

"부끄럽다면 그거겠지, 야쿠모 첸 "소녀님" 이었나."

"그건 정말로 부끄러워서 그만해 주세요. 정말, 유카리님도 재미있어 하시기만 하고......."


첸이 탄식했다. 레이무가 아는 야쿠모 란 같은, 아주 고생이 많아보이는 느낌이다. 그 자유분방한데다가 조금 멍청해 보이던 고양이 소녀가 이렇게도 변할 수 있는 건가 싶어 레이무는 기묘한 감개를 품었다.


'뭐, 만년 이상이나 지나서 뭐든지 옛날 그대로였다면 그쪽이 이상하긴 하겠지만.'


거기서 문득 "응?" 하고 레이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첸."

"왜 그러시나요."

"나 말야. 이 시대에 왔을 때, 내가 있던 곳이 인간 마을 가까운 곳이라고 금방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어제랑....... 계절 이외에는 그다지 변한 건 없는 경치였단 말인데."

"그런가요......."

"응. 하지만 만 2천년 후였나? 그런데도 그렇게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레이무가 솔직하게 의문을 표하자 첸은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죠. 물론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이유라. 어떤?"

"어떤 분의 유언이었어요. 이 환상향을 자기가 죽은 뒤에도 계속 같은 모습으로 있게 해 달라고."

"헤에. 말도 안되는 걸 요구한 녀석이 있었다는 거네."

"레이무 씨."


갑자기 첸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환상향은 예전 그대로인가요? 당신의 기억에 있는 그 경치와 하나도 다른 게 없는 건가요?"

"왜 그래, 갑자기. 진지한 표정 하고는."


레이무는 웃었지만 첸은 웃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진지했다.


"저기"


레이무는 뭔가 껄끄러움을 느끼고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작게 끄덕였다.


"응. 아직 전부를 둘러보진 않았지만, 경치는 어제랑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미래로 왔다고 들었지만 아직도 믿지 못할 정도고."

"......그런가요. 그정도로 환상향은 옛날 모습 그대로인가요."


첸은 길고도 긴 한숨을 토했다. 마치 여태껏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를 이제서야 내려놓은 듯이.

그리고 쑥쓰러운 듯이 눈가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에에, 별 말을. 아니, 왜 감사를 받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겠네요. 모르시겠군요. 죄송합니다."


첸은 가볍게 고게를 숙인 뒤 다시 조용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레이무도 당황하며 다시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왠지 케이네가 기분나쁜 눈알더미 괴물이 되어버렸던데."

"기분나쁘다니........ 실례에요 레이무 씨. 그 분의 본명은 겔그락치 바쵸라스굿티인데, 환상향에서도 손꼽는 지식인이란 말이에요."

"그런 거 모른다구....... 아아, 본명이란 말은 역시 그건 케이네 본인이 아니었구나?"

"레이무씨가 케이네라고 부르는 1대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씨를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 물론 달라요.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지금 케이네라 부르는 건 인간 마을의 수호자와 서당의 선생을 겸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에요."

"즉, 케이네라는 게 직함처럼 됐다는 거야?"

"이름 계승제에요. 인간 마을의 수호자였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씨에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마을의 수호자들에게 대대로 케이네라는 이름을 붙여 준 거에요."

"어딘가의 성인인가 하고 인간과의 혼혈이라던데."

"네. 반인반요라던가 '인간과 무언가의 사이에 있는 자'라던가, 마을의 수호자이기 위한 조건이니까요."

"수인이었던 케이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렇다기 보다는 인간의 마을을 지키는 것이 케이네씨가 아니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째서?"

"분명, 나중에 알게 될 거라 생각해요."

첸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한 뒤 갑자기 멈춰 섰다.


'아, 여긴'


레이무도 눈치를 챘다.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유카리의 침실 문 앞이다.


'여기도 변한 건 전혀 없구나. 이 앞쪽에 자기 자신을 '소녀님'이라고 부르게 하거나 석상을 만든 틈새요괴 할망구가 있다 이거지.'


재회를 하면 일단 그 웃기지도 않는 태도에 대한 화답으로 오른쪽 볼에 스트레이트를 먹여주겠다는 의기양양한 레이무의 앞에서 첸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카리님께 레이무님이 오셨다는 걸 전해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첸이 배례한 뒤 슬며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레이무가 어찌저찌 두근거리며 수십초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 곤란한 듯이 보이는 첸이 다시 문을 열고 돌아왔다.


"저기, 레이무 씨."

"왜 그래?"

"죄송합니다. 유카리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레이무는 허탈해졌다.


"이것 봐."

"그러고 보니 레이무 씨와 재회한 충격으로 지금이 한낮이란 걸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깨우려고 했더니 거칠게 물리쳐버리면서 "레이무?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구나. 뭐, 밤까지 기다리라고 해 줘." 라더군요."

"여전하네, 그 녀석도."


레이무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쉰 뒤 "뭐, 괜찮겠지"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어떻게 해서라도 지금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밤까지 기다릴게."

"괜찮으신가요?"

"응, 뭐, 들어가서 있는 힘껏 날려버리고 두들겨 깨우는 것도 나쁘짆 않지만 그런 걸로 시간이 걸리면 아까우니까."

"아깝다, 라 하심은."

"왠지, 말야. 예감이 들어. 상황을 파악했더니 이제서야 감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 같아.


레이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오늘 정도뿐인 것 같아.아마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없겠지."

"그런가요."

"응.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무녀로서의 감, 인가요?"
"그래. 뭐, 애초에 어째서 이런 미래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걸."


그런 것에 대해서 레이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유카리가 나쁜 장난이라도 쳤다거나 마리사의 버섯이 어쨌다거나 에이린의 약이 저쨌다거나, 그런 거겠지.'


뒤집어 말하면 원인이 될 게 너무 많아서였다.


"뭐, 어떤 게 원인이든 깨놓고 말해서 대책이 변하는 건 아니야. 원인을 일으킨 녀석을 탄막으로 반죽하고 난 뒤 술이나 안주를 받아내서 적당히 부어라 마셔라 한바탕 하면 되는걸."

"여전하시네요."

"그게 암묵적인 이해라고 할까, 약속같은 거잖아, 우리에게 말야."

"그러..... 네요."


가늘어진 첸의 눈이 쓸쓸한 빛을 띄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이무는 입이 근질거렸다.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단 말야, 이런거. 뭔가 좀 미적지근한 느낌이란 말이지.'


레이무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첸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왠지 내가 여기로 올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 그렇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첸에게 "어떻게"라고 묻자, 그녀는 짖궂은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레이무 씨 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에요. 오늘, 이 날에 어릴 적의 자신이 환상향을 찾아올거라고. 레이무 씨와 만나기 전까지는 오늘이 그날이란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요."

"흐~음."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겠다 싶었던 레이무는 고개를 끄덕었다. 게다가 지금 들은 것 덕분에 알아낸 게 하나 있다.


'오늘 여기로 올 걸 12080년 전의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즉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무사히 원래의 시대로 돌아갔다는 거겠지. 좋아, 이걸로 걱정할 건 없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레이무는 웃으며 첸에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슬슬 가 보도록 할게."

"아, 그러신가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서 죄송해요."

"아냐, 여러모로 알게 된 것도 있고. 아, 덤으로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

"무엇인가요."

"야쿠모 란 소녀님은 어디로 간 거야? 통 보이질 않는데."

"소녀님은 그만둬 달라니깐요. 란 님이라면"


첸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반딜리아 성계에서 일어난 제 37차 승발라리아 전쟁의 감시를 하기 위해 나가 계십니다. 이 전쟁의 형세가 이쪽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기에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헤에, 그렇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레이무는 적당히 흘러넘겼다.









유카리의 저택에서 나온 레이무는 일단 하쿠레이 신사 방향으로 날았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면 역시 거기였기도 하고, 신사가 환상향의 끝자락에 있는 이상, 날아가는 도중에 여러 장소를 돌아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 음, 요괴의 산은 변함없네. 모리야 신사는...... 있구나. 없어졌어도 좋았는데. 헤에, 인간의 마을도 조금은 커졌지만 그거 이외엔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고. 죽림에는 영원정도 있고...... 우와, 홍마관까지 그대로야. 여전히 악취미적인 색인데.'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레이무는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예전 그대로이다. 레이무에게는 어제의 경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긴 정말 1만년 이상의 미래세계일까. 어쩌면 속고 있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해 봐도 방금까지 이야기하던 첸의 모습은 틀림없이 첸이 성장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누군가가 짖궂은 장난을 위해 속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를 모르겠다.


'상관없으려나. 혹시 속았다고 해도 기가 막히는ㄷ 발상에다 꽤 재밌는 거짓말이기도 하고. 그냥 걸려주도록 하자.'


어제와 다름없는 환상향의 하늘을 날며 레이무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마법의 숲 위를 지나던 도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사는 없다고 했었나.'


깊은 숲에 가려져 숲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환상향 전체가 이렇게까지 바뀌지 않았다는 건, 마리사의 집도 그대로 있다는 걸까. 살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생각해도 별 수 없겠지. 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이 살아있다는 건 앨리스도 여전히 있다는 거겠고, 나중에 놀리러 가 보도록 할까.'


하지만 마리사가 나와 같은 상황에 빠졌다면 엄청나게 재미있어 하겠지, 조금은 유감스러운 느낌을 받으며 레이무는 하쿠레이 신사로 계속 날아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이무는 하쿠레이 신사의 경내에 착지했다. 여기도 역시 어제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 내가 아닌 하쿠레이의 무녀가 있다고 했지.'


몇 시간 전에 만난 여자애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여기엔 자기와 같은 이름을 쓰면서도 자기보다 머리가 좋아 보이고, 더욱이 빈곤해 보이지도 않는 무녀가 있다고 했던가.


'말하자면 케이네처럼 내 이름도 계승제가 됐다는 거겠지. 흥, 몇대째의 레이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를 얕보지 말란 말야. 주제넘은 태도를 취하면 초대 레이무로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이면서 전력으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줄테야.'


그 때의 울화를 생각해 쓸데없이 호전적이 되며, 레이무는 거친 모습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초대 레이무님께서 돌아오셨느니라-앗!"


하고 한껏 기분에 취해 소리쳤다. 그러자


"초대님이신가요."


방울 소리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고, 신사의 그림자에서 한 명의 여성이 조용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작은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레이무는 무심코 숨을 죽였다.


초 여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가는 흑발은 거칠 것 없는 냇물처럼 빛을 춤추게 하고 있었다. 등은 올곧고 길게 펴져 있었지만, 그걸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다. 고상하고 그윽하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은은하게 떨고 있었다. 단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양 손은 눈보다 하얗다. 발걸음은 청초했으며 돌계단을 사뿐히 내려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아련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꿋꿋한 미모를 자랑하며, 조금 가는 듯이 보이는 몸매는 덧없게 보이면서도 부드러움과 칼날 심지의 강함을 고루 갖추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 전체에서 레이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쳐흘렀다.


'버, 벚꽃이....! 저 애의 등 뒤에, 아름답게 춤추며 흩날리는 벚꽃이 보여! 지금은 여름일텐데......! 이 무슨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두려움에 전율하는 레이무의 눈앞에, 이상적인 위치에서 멈추어 선 무녀는 눈을 살며시 감은 그대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초대님의 귀환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했습니다앗!"


레이무는 전력으로 무릎을 꿇었다.


"엣....... 저, 저기, 초대님?"

"야, 이거 참 정말로 죄송합니다. '환상향의 무녀라면 나밖에 없잖아. 코치야 사나에? 하핫, 그녀석은 2P칼라일 뿐이고' 라던가 주제넘은 소리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부디 용서를.....!"


레 이무는 비굴해졌다. 더이상 비굴해질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해졌다. 무엇보다 레이무를 비굴하게 만든 건 눈 앞에 있는 무녀의 모범으로 보이는 미녀가 틀림없이 자기가 고안해 낸 것이 분명한 겨드랑이가 뚫려 있는 무녀 복장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왜 제대로 된 무녀복을 입지 않고 저런 부끄러운 옷을 입었던거야 난. 죽어. 죽어버려!'


돌바닥에 머리를 쾅쾅 내리찍기 시작한 레이무의 머리 위에서 "잠, 초대님, 정신을, 정신을 차리세요!" 하고 미래의 레이무가 외치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미안해."

"아니요, 전 초대님이 어째서 사과를 하시는지 모르겠는걸요......."

"몰라도 좋아. 아, 일단 내일부터 그 무녀복은 폐지해. 제대로 된 걸로 입어."

"어머, 그런. 이건 초대님에게서 물려받아 계승한, 유서 깊게 내려오는 무녀복이에요. 폐지라니, 도저히."

"그렇단 말은 저렇게 내려오기까지 수백명 단위로 겨드랑이가 열린 무녀가 환상향의 하늘을 날아다녔단 말입니까!"

"네. 이 무녀복을 입음으로서 겨드랑이 부분을 통해 팔백만의 신님들이 신통력을 넣어준다는 말이 전해져서요."

"게다가 뭘 무리하게 말도 안되는 이유를 집어넣은거야 난! 우와아, 진짜 죽고싶네!"


언제나의 하쿠레이 신사의 언제나의 툇마루에서, 레이무는 데굴데굴 굴렀다. 비굴한 느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야, 내 자신은 멋진 디자인이라고 생각했고,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자신도 있었지만 말야! 그치만 이런 정통파 미녀가 입으면 이건 그냥 질 나쁜 농담이라고밖에 생각이 안되잖아!'


그런 걸 생각하며 절규하는 초대님의 모습을, 미래의 레이무는 약간 굳은 미소를 띄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저기, 초내님."

"왜, 왜그래?"

"뭔가, 제 복장에 미흡한 점이라도 있었던 건지요."

"아니, 미흡한 건 나라서 죄송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하쿠레이의 무녀의 상징이기도 한 무녀복을 이 몸에 걸치는 것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 렇게 말하고 나서 미래의 레이무는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미소 짓지 말아줘, 너무 눈무시니까." 하고 작게 중얼거릴 지경에 이르러 레이무는 간신히 약간이나마 진정했다. 거북한 기분에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미래의 레이무를 향했다.


"어디, 그럼 일단 인사라도. 처음 뵙겠습니다, 저, 하쿠레이 레이무입니다.

"네, 처음 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하무레이 레이무라고 합니다."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진지하게만 보였지만 의외로 농담도 통하는 애려나 싶어 레이무는 인식을 조금 고쳤다.


"그래서, 그........ 당신은 몇대째야?"

"네, 저는 초대님으로부터 시작해 318대째의 하쿠레이 레이무입니다."

"318대란 말이지. 뭐, 1만 2천년도 더 지나면 그 정도는 되려나."


그렇다면 무녀가 바뀌는 평균연령은....... 을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그런 건 알아도 별 의미가 없다.

거기서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레이무는 물어보았다.


"저기, 가계도 같은 거 있어? 조금 보고싶은데."

"아, 네.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318대째의 레이무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안채에 들어갔다. "으으음 좋은 엉덩이로다" 하고 의미없이 중얼거린 뒤, 내어온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찻잎이 항상 자기가 쓰던 것보다 훨씬 좋은 걸 알고 나자 뭔가 분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음, 수고 많았다...... 그건 그렇고 역시 좀 기네."


318대째의 레이무가 가져온 것은 꽤나 큰 두루마리였다. 왠지 비술이나 다른 무언가라도 있을 것만 같은 크기였다.

조금 떨면서 레이무에게 318대째가 '여기 있습니다' 며 두루마리를 펼쳐왔다.

물론 전부 한번에 펼칠 수는 없었으므로 레이무는 조금씩 둘둘 말아가며 가계도를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처음에 있는 게 318대고 다음이 317대........"

"저랑 어머니에요."

"당신은 아직 아이가 없어?"

"네."
"흐~음. 좋아하는 사람이라던가?"

"어머나, 그런. 부끄럽습니다."


318대째가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귀엽잖아 젠장, 이라고 생각한 뒤, 레이무는 가계도를 계속 되짚어 올라갔다.


"267대째 레이무, 266대째 레이무...... 저기, 뭔가, 계속 레이무밖에 없는데."

"네. 30대째까지는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30대째가 초대님을 엄청나게 존경하면서 "이제부터 하쿠레이의 무녀는 모두 레이무라는 이름을 쓴다."고 정했다고 해요."

"것 참 괴팍한 성격이구만."


자신에게 그런 열정적인 신봉자가 생기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레이무는 등이 근질거렸다.


' 그건 그렇고, 30대째라는 건 나 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었을 텐데...... 본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을 존경하게 될 정도로 내 이야기가 남았다는 거겠지. 알고 지내는 요괴들은 다들 살아남았다는 듯 하기도 하고, 아마 누군가가 재미있고 이상하게 곡해해서 전했겠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가계도가 문제의 30대째에 이르렀다. 확실히, 여기까진 모두 이름이 레이무였다.


"것보다, 이 가계도, 거의 한줄밖에 없네."

"네. 하쿠레이 가 이외의 가계는 생략되어 있는데다가 분가가 생기면 여러모로 귀찮다는 이유로 아이는 하나만 키우는 것이 관례랍니다."

"흐음. 뭐, 이해 못할 일도 아니긴 하지만."


확 실히, 하쿠레이 가의 집안싸움 같은 건 레이무 자신도 상상하기 싫은 귀찮은 일이다. 애초에 하쿠레이의 무녀같은 귀찮은 역할 때문에 싸우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긴 하지만, 어디에나 이상한 녀석들은 있는 법이고, 예방하는 차원에서 정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이거 다들 피는 이어진 거야?"

"아니요. 안타깝지만 아이를 만들지 못한 분도 계셔서요."

"그래. 이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는걸. 그런 일도 있을 법 하지....... 그건 그렇고, 양자가 들어와도 가계도가 이어지는구나."


하쿠레이의 피가 하쿠레이의 무녀가 되기 위한 절대조건은 아닌 것도 처음 알았다. 물론 애초에 초대 하쿠레이 무녀 자체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걸, 요컨데 힘이 쌔기만 하면 누구나 해도 되겠지. 그렇게 간단히 납득했다.


'적당적당하구만. 환상향답다면 환상향답지만.'


거기서 문득,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이랑 나는 당연히 혈연관계가 아닌 거네."

"네. 매우 아쉽지만요."


이건 레이무 자신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피을 이은 자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정통파 무녀다웠다. 그런 걸 생각하자 왠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초대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방향성은 다르지만 나도 나름 잘 나간다고 생각하고 말야."


얼버무리면서 레이무는 계속 가계도를 읽어나갔다. 30대째 이후가 전부 레이무라는 설명대로 그 이전에는 레이무 이외의 이름도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것도 극소수. 레이무 이외의 이름은 너무나도 적어서 위화감마저 들 정도였다.


"저기, 어째서 레이무밖에 없는거야?"

"그건 물론 초대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하아. 그 말은 다들 나를 존경하고 있다는 거야?"


당연한 걸 묻는다는 생각했는지, 318대째는 웃지도 않고, 오히려 흥분한 듯이 볼을 붉히며 몇 번이고 끄덕였다.


"당연한걸요! 저도 레이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걸 긍지로 여기고 있고, 원조이신 초대님과 만난다는 이 더할나위 없는 명예를 얻었다는 건  선조 레이무님이나 앞으로 태어날 아이 레이무에게 송구할 정도인걸요."

"흐~음. 뭔가 잘 모르겠는데."


동시에 조금 근질거렸다.


"저기, 나 말야, 그렇게나 큰 위업이라도 이룩한거야?"

"네. 그렇게 들었어요."

"뭘 한거야? 환상향의 위기를 구했다던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보다 유카리 쪽이 훨씬 열심히 했을 텐데."


레이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318대째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초대님 때에 환상향이 멸망한다던가 하는 그런 큰 위기는 일어난 기록이 없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평화에 찌들었던 참이었고."

"하지만 초대님은 지금 이 환상향의 평화가 지켜지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을 만들어 내셨답니다. 그 공로가 너무나도 대단해서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된 거지요."


그렇게 말하는 318대째의 눈에는 순수한 존경의 빛이 감돌았다. 레이무에게 있어서는 익숙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조금 쑥쓰러워져서 미묘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말야, 자기가 그런 큰 일을 해냈다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질 않는데."

"네? 그건 이상해요."


318대째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초대님의 지금 나이라면 아마 이미 위업을 이룩하셨을 텐데요........."

"뭐? 무슨 소리야?"

"그건...... 아니요, 그만 말하도록 할게요."


318대째는 짓궂은 듯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멈췄다.


"초대님께 저보다 훨씬 더 그 말을 전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니까요."

"응? 누구야 그거."

"초대님도 잘 아는 분이랍니다. 아마 오늘, 조금 있으면 오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 구나."


누구를 말하는 건지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아니, 일단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지만 이성이 "말도 안돼." 라며 부정한다.

그 갈등으로부터 레이무는 억지로 의식을 끊으며 다시 가계도로 눈을 돌렸다.


'어디, 17대째 레이무, 16대째 레이무, 오우카, 세츠나, 15대째 레이무, 14대째 레이무, 13대째 레이무, 릿카, 12대째 레이무, 뱌쿠야, 11대째 레이무......'


이렇게 보니 정말로 레이무라는 이름이 많다. 30대째가 억지 규정을 만들기 전에도 이미 이정도이니, 자기는 어지간히 경애받는 듯 하다.


'대체 뭘 한걸까, 난......... 아니, 이미 했다고는 들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레이무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가계도의 어떤 부분에서 나타난 이름을 보고 무심코 숨을 삼켰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니, 그야, 이 애의 이름!"


푸훗, 하고 웃으며 레이무는 어떤 항목을 가리켰다.

그곳에 써 있던 건 '미코(魅子)' 라는 이름이었다.


"아, 그건......."

"이거, 미코라고 읽는 거 맞지?"

"네에."

"하쿠레이의 무녀이면서 미코(일본어로 무녀)라니, 이 이름 지은 녀석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충 지었잖아. 대체 누구야, 이렇게 적당적당히 이름을 붙인 녀석이."


엄청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두루마리를 조금 잡아당기자, 그곳에 적혀 했는 이름은 '초대 레이무'였다.


"뭣, 나라고오!?"

"그게, 네에."

"우와, 뭐야 그거, 아무리 그래도 자식에게 무녀라고 이름붙이다니 말도 안....... 되지는 않을지도. 응, 나라면 그럴거야, 분명."


자식이 태어난 그 날에 '이름을 뭘로 할거야' 같은 걸 들어서 '귀찮구만. 무녀가 될 거니까 '미코'로 괜찮잖아?' 라던가. 그런 대답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쉽게 연상돼서 레이무는 상당히 침울해졌다.


"우와아, 미코, 미코라니, 나......... 이 애, 나랑 피는 이어진 거야?"

"아니요, 양자라는 것 같아요."

"들여온 자식에게 그런 적당한 이름을........"

"하지만 상당히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고 해요."

"그래?"

"네. 초대님도 미코님을 매우 귀여워하셨다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니까요."

"......내 일이면서도 전혀 상상이 가질 않네."


으으음, 하고 레이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신음했다.

덧 붙여서, 자신의 다음 대가 양자였다는 것에 위화감은 없었다. 지금 좋아하는 남자같은 것도 없었고, 아마 나중에도 그렇게까지 남에게 끌리는 일은 없겠지 싶어서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왠지 모르게 확신이 있었다. 혈육을 남길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어쨌든, 가계도는 이걸로 전부 봤다. 이것보다 전의 대는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서라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딱히 흥미도 없었다.


"응, 다 봤어."

"네. 만족스러우셨는지요."

'그러네. 일단 유별나게 이상한 가계도였다는 건 잘 알았어."


318대째는 곤란한 듯 웃고 가계도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러 갔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중, 레이무는 조금 식어버린 차를 들이키며 1만 2천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도 길어서 제대로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조금 흥미가 동해서 돌아온 318대째에게 질문해 보았다. 


"저기 말인데. 이 환상향, 겉으로 보기엔 내가 있던 때랑은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때?"

"실제로, 말씀이신가요?"

"그래. 1만 2천년이나 지났는데 주민들 쪽은 상당히 변화가 있지 않겠어? 아, 맞다. 마을의 수호자인 케이네는 어딘가의 성인이라고 했었고 말야."

"아, 그러고 보니 초대님 때에는 아직 우주인 쪽은 극히 적었죠...... 영원정의 분들만 환상들이를 하셨었으니까요. 애초에 카구야님들을 우주인이라고 부르는 건 뭔가 다른 듯 한 느낌이 들지만요."


".......우주인?"

" 이 지구 이외의 별에 살고 있는 분들을 말한답니다. 초대님의 시대로부터 조금 지났을 때, 외계에서 우주항행의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태양계, 은하계, 나아가선 외우주로 판도를 넓혀간 지구인이 여기로부터 너무나도 아득한 별에서 지구 이외의 생명체와 처음으로 접촉했을 때, 유카리 소녀님이 결계의 구조를 변경하셨습니다. 지구 뿐 아니라, 그 이외의 혹성에서 잊혀져 사라져가는 이들이나, 성간전쟁 같은 걸로 인해 멸망해버린 별의 분들도 이 환상향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셨답니다.


들어본 적 없는 단어가 많아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레이무는 이해했다.


"즉, 환상들이를 하는 범위가 이 별 이외로까지 넓어졌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많은 생물이, 이 좁은 환상향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아, 초대님께선 아직 모르셨던가요."

"뭐를?"


318대째는 웃으며 검지를 세웠다.


"환상향도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확장공사를 해 왔습니다. 외계 인종의 의식이 우주에 넓게 확산되어 있는 것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도 있고 해서 지금은 지구 전체까지 넓어져 있답니다."


레이무는 눈을 끔뻑였다.


"......그 말은 즉, 이 별 전체가 환상향이란 말야?"

" 네, 그렇습니다. 덧붙여서 이 별 전체를 가리킬 때에는 환상향이 아니라 환상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은하수까지 영역을 넓혀간 인류는 마침내 자기들이 태어난 별 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는 거에요. 별 자체가 야쿠모 님의 결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볼 수도,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싱긋, 318대째는 웃으며 끄덕였다.


"이 일대는 옛날과 변함없이 환상향이라 불리게 됐고, 환상성 발상지로서 성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1만 2천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거에요."

"......솔직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겠어......"

"그러신가요. 무리도 아니겠죠."


거기서 318대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사과한 뒤, 눈을 감고 머리 양쪽에 손가락을 짚었다. 그리고선 이곳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이쪽은 하쿠레이 신사 본산. 어쩐 일이신....... 네, 돈파치 행성 분들이 독립도시 선언을........ 이 별의 환경에는 익숙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알겠습니다. 곧 이변해결을 하러 가 주세요. 괜찮습니다. 그들도 이 별 이외에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스펠카드 룰을 따라 줄 겁니다. 아, 해결 이후의 연회도 잊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말을 마치고, 318대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미소지었다.


"실례했습니다."

"......누구랑 이야기한거야?"

"아아, 하쿠레이 신사 북아메리카 지방 제 776 분사와......."

"분사라니, 당신....... 엥, 하쿠레이의 무녀는 당신뿐이 아니었던 거야?"

"네. 하쿠레이의 무녀는 저뿐이에요. 하지만 확장공사를 거쳐 환상향이 넓어진 이후로는 혼자서 이변을 해결하기엔 손이 부족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세계 곳곳에 분사를 세워서 이변 해결을 도와주시는 분들과 연락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 자신은 이변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요, 그게"


318대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환상향에 사시는 분들이 때때로 변덕으로 이변을 일으키셔서, 상당히 빈번하게 이변해결을 하러 움직이고 있습니다."

"......덤으로, 최근의 이변은 뭐야?"

"그게,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건 홍마관의 레밀리아 님이 일으킨 제 3574차 홍무이변입니다만."

"그녀석은 대체 언제쯤 되야 질리는 건데!"

" 이변 자체가 스트레스 해소를 겸한 축제의 일종이니까요. 거기에 환상향이 지구 전체로 넓혀졌다고는 해도, 요괴 퇴치나 이변 해결의 짜임새는 초대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답니다. 규모가 커졌을 뿐이지,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 예전과 같으니까요."

"시대가 나아간 건지 뒤처진 건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상상 밖이다. 그럼에도 318대째의 눈에 의혹이라곤 보이지도 않으니 아마도 이 시대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거겠지.

머리를 감싸안는 레이무의 옆에서 318대째는 막힘없이 설명했다.


"결계의 상태를 감시하는 야쿠모, 인간의 마을을 수호하는 케이네, 이변을 해결하는 하쿠레이, 이변을 일으키는 새입자나 이형의 누군가들...... 이런 역할은 아마도 초대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그게, 환상향의 밸런스를 유지한다는 목적을 위해, 가장 완성된 구조이니까요."

"완성된 구조, 란 말이지."

" 그렇답니다. 실제 기록을 보더라도, 이 1만 2천년간 계속 그런 걸 반복하고, 이 땡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었어요. 전력으로 싸우면 부서져버리는 여린 낙원.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저 나태함에 젖어 타락할 뿐...... 그렇기에 저희들은 이변에 가까운 것을 일으키고 해결하여, 끝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의 평화로운 해결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정말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잘도 질려하지 않는걸."

"모든 분들께서 매번 여러가지로 취향을 바꾸시니까요. 누가 가장 재미있는 이변을 일으키는가를 경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요."


큭큭 웃는 318대째의 눈을 보자, 그녀도 이변 해결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이 애도 역시 하쿠레이의 무녀랄까, 환상향의 주민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태평스럽달까 넉살좋은 모습이랄까.'


그런 감상에 젖으며, 레이무는 '그럼' 하고 찻잔을 놓고 일어났다.


"슬슬 가볼게."

"어디로 말씀이신지요?"

"밖으로. 새전함 쪽에서, 기다려."

"기다린다, 하심은."


318대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역시 초대님이시네요. 벌써 대강의 이야기는 알아내셨다는 거로군요."

"뭐, 일단은. 내가 달성한 위업이란 것도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충은 이해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무는 진절머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대대손손 내 이름을 물려받을 정도로 경애하지는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싫으신 건가요."

"무거워서 싫다구. 거기에 뭐랄까, 대응하기도 힘들고."


그렇게 말한 뒤, 아, 그래서인가, 하고 레이무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걸 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석은. 괴롭히기라도 할 생각이려나."

"그런 건"


말하면서 318대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뭐, 적당하게."

"저는 잠시 용무가 있으니, 두 분의 방해는 하지 않을테니까요."


신경을 써 주는 일에 생색을 내는 녀석이구나, 싶어 약간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무는 "응, 뭐, 아무래도 좋지 않겠어." 라고 답한 뒤, 신사의 밖으로 나왔다.

새전함 앞의 계단에 기대어 경내를 바라보았다. 1만 2천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광경이었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갔을 텐데.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어.'


이런이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레이무는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멋진 새전함까지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아마도 함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예전과는 상당히 다르리라 생각되지만.


'.....318대째 하쿠레이 레이무님은 꽤나 인기가 많아 보였고, 새전도 잔뜩 들어있겠지.'


열받으니까 나중에 조금 실례할까, 하고 불온한 생각을 했을 때, 레이무의 귀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 누군가가 돌계단 위로 올라오는 경쾌한 소리.


'왔나.'


어울리지 않게, 조금 두근거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저쪽 입장에서 보자면 1만 2천년만에 보는 거니까.


'애초에, 저쪽은 어떤 모습으로 만나러 오는거야? 설마 울면서 껴안는다던가 하려나.'


만약 그런 걸 하려 든다면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역시 울어야 할까. 아니면 그 우는 얼굴을 손가락질 하면서 있는 힘껏 비웃어 주는 쪽이 더욱 자신다워서 상대방도 기뻐할까.


'아아, 나 참 복잡하다 복잡해.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사람들 반응에 신경쓰는 거 자체가 전혀 나답지가 않은데말야.'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어쨌든 첫 경험이다.

1만 2천년간, 계속 자신을 잊지 않고 기다려준 사람과 이제부터 재회하는 거니까.


'망했네. 엄청 두근거리고 있어. 이쪽은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여름 햇빛의 푹푹 찌는 더위에 어울리지 않는 흑백의 복장을 입고, 어께에 빗자루를 걸치고, 모자를 눈까지 눌러 덮어쓰고서.

토리이를 지나 오는 그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레이무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걸어온 뒤, 그곳에서 딱 멈춰 섰다.

그리고,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올린 뒤,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여어, 레이무. 놀러 왔다구."


1만 2천년 전과 전혀 변함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건, 틀림없는 키리사메 마리사 본인이었다.






<계속>







 

작가의 말



1만년 하고도 2천년 전에서 어떻게 된건지.


왠지 그런 느낌의 이야기.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법 한 것을, 제 나름대로 써 보았습니다.

누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써 나가겠습니다




-aho- 

 

 

 

Posted by 청전Lum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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